‘노인 한 명을 잃으면 큰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셈이다’라는 말은 노인은 지혜 산실로 사회의 스승이라는 뜻이다. 사회 가치 확산을 꾀하는 일에 부천시 노인들이 뛰어들어 그 지혜를 적극 활용해 ‘건강한 문화도시’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

‘마음 도닥도닥 할머니 약손’ 이라고 이름 붙인 이 사업은 경기 불황과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시민들에게 노인의 지혜가 담긴 글귀를 전달하는 일이다. 공공 캠페인 웹사이트 ‘할머니 다방’에서 글귀를 담은 전자책 열람이 가능하다. 한국메세나협회 ‘2023 지역 특성 매칭 펀드’ 공모에 선정돼 교부금과 관내 기업 기부금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할머니 다방'에서 만날 수 있는 고민과 답변들.
'할머니 다방'에서 만날 수 있는 고민과 답변들.

#전국 평균보다 높은 노인 인구

현재 부천시 65세(법정 나이 기준)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은 전국 평균보다 높은 15.7%(2020년 한국통계정보원 전국 평균 15.2%)로 나타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보건복지부 발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이 우울증 발생률 1위 국가이고, 어른 4명 중 1명은 정신 건강 문제를 경험하지만 오직 12%만 전문가 도움을 받는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이에 시는 늘어나는 노인 인구에 따라 이들이 사회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다양하게 제공함으로써 고립을 줄이고 목적의식과 성취감 제공으로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할 방안을 찾았다.

부천시는 2019년 국가법에 근거해 지정한 국내에서 첫 번째 문화도시로 우뚝 섰다. 이에 시는 ‘말할 수 있는 도시, 귀담아 듣는 도시’를 지향하면서 세대 간 ‘말하고 듣는’ 과정에 중점을 두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몰두했다.

답변을 작성하고 있는 김옥재 할머니.
답변을 작성하고 있는 김옥재 할머니.

#할머니 손은 약속

증가하는 노인 인구를 잉여 인력으로 여기지 않고, 이들의 경험과 지혜를 적극 활용해 대내외 여건으로 우울과 불안이 높아지는 현대인들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건강한 문화도시 형성에 노력한 결과물의 하나가 바로 ‘마음 도닥도닥 할머니 약손’ 사업이다.

사업을 추진한 부천문화재단 관계자는 "어렸을 때 할머니 집에 놀러 가면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었다.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온종일 욕심껏 먹고 나면 한 번씩은 꼭 배탈이 나곤 했다. 그 때마다 할머니는 제게 ‘할머니 손은 약손’을 흥얼거리며 끙끙대던 제 볼록한 배 위로 주름진 손을 뱅글뱅글 문질러 주셨다. 이제는 거울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비치는 나이가 됐지만 가끔 마음이 힘들 때면 당시 할머니의 나직한 목소리, 할머니 냄새, 따뜻한 구들방, 주름지고 투박했던 ‘약손’이 떠오른다"고 회상했다

재단은 오랜 시간 살아온 노인의 경험과 지혜를 문화예술 방식으로 젊은 세대와 공유함으로써 세대 간 갈등과 격차를 해소하고 더 나은 문화도시를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더욱이 전 세계에서 대두하는 ESG(환경·사회·투명 경영)에 따라 사회 가치 실현 측면에서 모두 함께 성장하는 문화도시 조성과 문화예술 가치 확산에 이바지하리라 기대한다.

‘부천 할머니체(글씨)’를 만든 전정숙 할머니가 빛날 부스 앞에서 환하게 웃는다.
‘부천 할머니체(글씨)’를 만든 전정숙 할머니가 빛날 부스 앞에서 환하게 웃는다.

#한 줄 질문, 한 줄 답변

‘마음 도닥도닥 할머니 약손’ 사업에는 부천지역 노인을 주축으로 전 세대가 참여한다. 마음의 어려움을 겪는 시민에게 노인의 지혜를 담은 글귀를 전달하는 일이다. 재단 공식 뉴미디어 채널을 활용해 남녀노소를 대상으로 ‘한 줄 질문’을 받는다. 참여할 노인을 모집하는 일은 부천 대산종합사회복지관과 부천아동문학연구소가 협력해서 한다.

질문을 접수한 뒤 답변은 사전 수집한 질문을 바탕으로 정리해 노인의 지혜와 재치를 담은 ‘한 줄 답변’으로 내놓는다. 또 답변을 담은 전자책과 할머니 손 글씨 폰트, 인생 네 컷 프레임은 ‘할머니 다방’ 웹사이트에서 배포한다.

‘할머니 다방’ 웹사이트에서 한 젊은 여성은 "좋아하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고백을 못하고 있어요. 용기를 내서 고백하고 싶은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네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는 질문에 상담 노인은 "좋아하는 마음보다 자존심이 더 앞에 있으니 고백을 하겠나. 좋아하는 마음이 자존심을 앞서려면 사랑이 싹 터야지. 그래도 좋을 때다 좋을 때야"라는 상큼한 답을 줬다.

또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은? 지금 이 순간, 오늘 이 순간 무엇이 중요한가요? 어떤 일이 중요하다고 여기며 사시나요?"라는 질문에는 "매 순간이 중요하던데. 순간과 순간이 모여 지금의 내가 있지. 살아보니 감사하는 일이 내가 사는 길이고 행복이 들어오는 길이더라고" 라는 인생 길에 대한 답을 내놨다.

가족에 대한 상담도 이어진다. "부모님과 30년째 같이 사는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느 순간부터 자기 전 밤마다 부모님이 제 옆에 계시지 않는 시기에 대한 고민에 잠을 뒤척거리는 날이 생깁니다. 매일 밤 이런 걱정과 두려움에 힘든데 어떻게 이런 마음을 이겨낼까요" 라는 질문에 상담 노인은 "나쁜 생각을 하다 보면 좋은 기운이 멀어지게 돼. 부정한 생각으로 가득찬 생각 창고를 비워 봐. 지금 이 순간 걱정보단 부모님과 뭘 같이 할지를 생각하면 어때?" 라는 지혜를 줬다.

"제가 잘하는 일이 없는 듯싶어요. 뭐든지 중간은 가는데 중간만 가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제 자신이 할 만한 한계를 정해두게 됩니다" 라는 일상생활에 대한 고민에는 "중간이라 얼마나 다행이야. 꼴찌는 아니잖아. 잘하는 일 나오면 앞으로 계속 나아가게 되잖아? 살다 보니 잘난 놈보다 꾸준한 놈이 최고더라"라는 격려와 용기를 북돋우는 답도 내놨다.

‘마음 도닥도닥 할머니 약 손’ 한 줄 답변에 참여 중인 상담원 전정숙 할머니는 "오늘이 살면서 가장 행복한 날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글귀를 보며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김옥재 씨는 "내 인생 꿈을 이뤘다. 생전에 책 하나 내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한 말을 담은 작은 책 「할머니 다방」을 받고서 말로 이루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감사했다. 더구나 내가 전한 말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따뜻한 위로가 된다니 좋다"는 소감을 전했다.

‘마음 도닥도닥 할머니 약손’ 참여자와 관계자들.
‘마음 도닥도닥 할머니 약손’ 참여자와 관계자들.

#인생 라떼

이화윤 부천아동문학연구소 소장은 "선한 생각과 마음은 서로 통한다는 진리를 알게 해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4년 동안 생각을 공유하고 마음을 열어 많은 이야기를 함께 나눴던 어르신들이 계셔서 참 행복했다. 그래서 ‘할머니 다방’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다. 힘들고 어려운 세상 인내하면서 살아오신 삶의 연륜을 담은 말이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마음을 어루만졌으면 좋겠다. ‘내가 이 나이에 뭘 하겠어?’ 라는 생각에서 이제는 벗어나 지금 이 나이라 가능한 일을 아주 훌륭하게 해낸 셈이다. ‘할머니 다방’을 애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인생 라떼’가 잘 팔려서 대박 나길 바란다"고 했다.

문화재단 측은 "문화도시 부천은 제1차 법정 문화 도시로 ‘말할 수 있는 도시, 귀담아 듣는 도시’를 지향하면서 세대 간 ‘말하고 듣는’ 과정에 중점을 두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할머니 다방’은 지역 기업 기부금으로 어르신의 사회 임무를 되새기는 기회가 됐다. 앞으로도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 있는 기업(단체)과 손잡고 건강한 지역사회를 만들려고 한다"고 했다.

부천=최두환 기자 cdh9799@kihoilbo.co.kr

사진= <부천문화재단 제공>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