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윤석열 정부가 내놓은 정책 방안 중 ‘헛발질’이라는 비판을 받는 경우가 많다. 대표 사례는 ‘만 5세 초등학교 입학’ 졸속 추진이다. 지난해 7월 박순애 당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입학 연령을 단계적으로 만 5세로 하향하겠다고 보고하자 윤 대통령은 "초·중·고 12학년제를 유지하되 취학 연령을 1년 앞당기는 방안도 신속히 강구하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하지만 학부모, 교육단체 등의 반발이 거세지자 철회했고, 박 장관은 결국 사퇴했다. 

또 올 1월 여성가족부에서 거론한 ‘비동의 강간죄’ 도입 추진도 논란이 일자 흐지부지됐고, 3월 고용노동부가 내놓은 ‘주 최대 69시간 노동’도 반발 여론이 거세지자 윤 대통령이 보완을 지시했는데, 아직까지 근로시간 개편안의 핵심 내용이 제시되지 않은 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3월 국민의힘 정책위원회에서 저출생 해법으로 ‘30세 전에 아이 셋 낳으면 병역 면제해 주는 방안’을 논의했다가 젠더 갈등을 부추긴다는 논란만 일으키고는 슬그머니 접기도 했다. 

4월 국민의힘 민생특위에서 쌀 소비 촉진 방안으로 제시한 ‘밥 한 공기 다 비우기 운동’ 아이디어도 황당하다는 비판을 받고 흐지부지됐다. 그리고 8월 23일 한덕수 국무총리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치안력을 강화하기 위해 ‘의경 제도 재도입’을 검토하겠다고 했고, 당시 배석했던 윤희근 경찰청장은 8천여 명 규모의 의경 인력을 순차 채용하겠다며 구체적 수치까지 언급하면서 의경제 부활을 강하게 시사했는데, 반발 여론이 일자 바로 다음 날 철회했다.

한편, 서울∼양평고속도로 종점 변경에 특혜 의혹이 일자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수년간 진행한 고속도로 추진을 장관의 단독 결정으로 ‘전면 백지화’시켜 국민을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이처럼 국가의 중요한 정책이 사전에 충분한 검토와 의견 수렴 없이 졸속 추진되거나 기존 정책이 쉽게 번복되는 사례들이 반복되자 행정 전반에 대한 국민 불신이 깊어지는데, 이런 사례는 최근에도 지속됐다. 10월 정부가 발표한 ‘의대 정원 확대 방안’도 일단 여론의 지지를 얻는 모양새지만 세부 각론에 들어가면 찬반 논란이 가중될 여지가 있어 앞으로 어떤 내용으로 진행될지 그리고 과연 만족스럽게 성공할지 국민들은 주의 깊게 진행 상황을 지켜본다. 

또 현재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아이 셋 이상 가구에 고속도로 버스전용차로 이용 허용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데, 반대 여론이 커서 실현가능성이 불투명하다. 특히나 최근 국민의힘이 제시한 ‘김포의 서울 편입 방안’ 내지 서울 주변 주요 도시를 서울로 편입하는 ‘메가시티 방안’은 장단점에 대한 최소한 검토마저 없이 얄팍한 정략적 고려 하에 나온 총선용 졸속 방안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 행정기본법은 ‘신뢰보호의 원칙’을 규정하는데(제12조), 제1항은 "행정청은 공익 또는 제3자의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행정에 대한 국민의 정당하고 합리적인 신뢰를 보호하여야 한다", 제2항은 "행정청은 권한 행사의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간 권한을 행사하지 아니하여 국민이 그 권한이 행사되지 아니할 것으로 믿을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그 권한을 행사해서는 아니 된다. 다만, 공익 또는 제3자의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는 예외로 한다"고 규정한다. 

한편, 행정법이론에서 인정하는 ‘공정력(公定力)’이란 "행정행위의 성립에 하자가 있는 경우에도 그것이 중대·명백하여 당연무효가 아닌 한 권한 있는 기관에 의하여 취소되기 전까지는 일응 유효한 것으로 통용되는 힘"을 말하는데, 그 이론적 근거는 행정법 관계의 안정성 유지, 상대방 신뢰 보호 등이다. 

이처럼 국정 운영에 있어서 ‘국민의 신뢰 보호’는 매우 중요하게 고려돼야 한다. 설익은 정책을 툭툭 던지듯 ‘깜짝 발표’했다가 ‘아니면 말고 식’으로 뒤처리하는 일은 지양해야 하며, 포퓰리즘에 지나치게 영합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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