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기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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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신뢰예요." 영어와 한글을 오묘하게 섞어 쓴 이 짧은 문장이 단연 화제다. 각종 예능과 광고는 물론이고 일상 대화에서조차 밈(meme)으로 활용되니, 이쯤 되면 창작자는 저작권료라도 받아야 되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씁쓸하게도, 올 한 해 최고의 히트어는 연예인도 정치인도 아닌 전과 10범의 ‘전청조’라는 사람에게서 나왔다.

2023년 10월 23일 여성잡지를 통해 펜싱스타 남현희 씨의 재혼‘남’으로 처음 소개된 재벌 3세 전청조는 등장과 동시에 각종 의혹에 휩싸이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4일 뒤인 10월 27일 새벽 전 씨가 남 씨 부모님 집에 찾아가 문을 열어 달라고 요구하던 중 스토킹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면서 둘 사이는 파경을 맞았다. 

결혼 발표부터 파경까지 단 4일간의 막장 드라마가 남긴 후유증은 너무 크다. 당장 법적 성별이 여성인 전 씨가 남자와 여자를 오가며 펼친 현란한 사기 행각에 더해 강화도 출신임에도 뉴욕에서 나고 자란 재벌 3세를 사칭하며 수많은 사람을 농락한 사실까지 확인되며 가히 사기꾼의 본좌급으로 급부상했다.

이쯤 되면 하나 궁금한 게 있다. 이 정도 거짓말에 속는 일이 과연 가능하느냐는 근본적 의문이다. 여성임에도 남성으로 믿었다는 건 차라리 전 씨의 완벽한 연기 탓이라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카지노 재벌의 혼외자라는 출생의 비밀에, 시가총액 1천400조에 달하는 글로벌 IT 그룹의 대주주로, 1시간 컨설팅에 3억 원을 받을 정도의 탈인간급 능력자라는 거짓말이 통했다는 건 당황스럽다. 간단한 인터넷 검색으로도 확인 가능함에도 웬일인지 사람들은 전 씨를 믿었다. 이유는 바로 전 씨가 강조했던 ‘신뢰’에 있다. 

전 씨는 화려한 언변과 함께 서울 최고급 주상복합에 고급 승용차, 경호원의 삼엄한 경호로 자신을 포장했다. 여기에 통 큰 선물과 ‘너한테만 주는 절호의 기회’라는 멘트는 상대에게 무한 신뢰를 주며 기꺼이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 당장 확인되는 피해자만 15명에 피해 규모만 19억 원이라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물론 최초 전 씨를 인터뷰했던 여성잡지 역시 기본적인 팩트 체크 없이 전 씨의 주장을 그대로 기사화한 걸 보면 일반인이 이를 의심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다.

이렇듯 사기는 피해자 신뢰를 바탕으로 성립되는 범죄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 사기가 만연하다는 점이다. 올해 초 전국을 강타했던 전세사기를 비롯해 크고 작은 각종 사기가 뉴스면을 뒤엎었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사기범죄 발생 건수는 32만5천848건으로 전년(29만4천75건)보다 10.8% 증가했다. 여기에 통계청 ‘재범자 재범 종류·기간’ 통계를 보면 지난해 사기범죄자 중 전과가 있던 사람은 7만2천550명이고, 동종 재범자는 3만3천63명으로 45%를 차지했다고 하니 전과 10범 전청조의 탄생 역시 납득할 만하다.

이렇듯 사기 재범률이 높은 이유는 바로 낮은 형량 때문이다. 대법원 양형기준상 일반사기(1억 원 미만) 기본 형량은 징역 6월에서 1년6월이고, 죄질이 불량해 가중처벌된다 해도 최대 2년6월이다. 여기에 사기 피해액이 300억 원 이상일 경우에도 기본 6년에서 10년이고, 가중처벌 시에도 최대 13년에 불과하다. 형사처벌을 감수하고라도 막대한 범죄수익을 챙기자는 한탕주의가 만연한 게 사기판의 현실이다. 이는 2017년부터 2021년 6월까지 사기범죄 피해액이 121조 원에 이르지만, 회수된 금액은 고작 6조5천억 원에 불과하다는 사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이제 사기가 인생 반전을 위한 재테크 수단이 된 셈이다.

사기는 한 개인을 파탄으로 몰고, 그 가족의 생계를 무너뜨리며, 때론 목숨까지 빼앗는 점에서 경제적 ‘살인’과 똑같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신뢰를 깨뜨려 불신을 만연케 해 서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은 덤이다. 그래서인지 지난 6월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12년 만에 사기범죄 양형기준을 수정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은 너무 반갑다. 

더는 사기범죄가 들끓지 않고, 무엇보다 한번 사기꾼이 또다시 같은 범죄를 꿈꾸지 못하도록 양형기준 현실화가 절실하다. ‘신뢰’라는 단어가 더는 가해자에게 농락당하지 않도록 엄중한 법적 처벌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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