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조 전 인천전자마이스터고 교장
박영조 전 인천전자마이스터고 교장

조석(朝夕)으로면 설(洩) 닫혀진 창틈 사이로 스미는 바람이 제법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래, 11월이고 가을도 깊었다. 

그런데 기온만 차가워진 게 아니라, 요즘 내 가슴 저편에서도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들리고 옷깃을 여미게 하는 멜랑콜리가 있다. 유행가 가사처럼 파란 낙엽이 돼 너무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 버린 몇몇 사랑하는 친구들이 남기고 간 이상기온 때문이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신앙생활을 함께했던 C친구는 "집도 짓고 승용차도 장만해 이제 살만 한데…" 하면서 연신 눈물을 흘리던 중환자실의 J씨 모습, 한 주일 사이에 있었던 H선배님, L후배 그리고 또 며칠 전 염소탕까지 같이 먹었는데 어제 부음을 들은 이웃 교회 K집사님, 이 같은 잇따른 애사로 내 가슴은 여름부터 철 이른 계절풍에 시달렸다.

그런데 오늘, 나는 또 이전에 있었던 교회 집사님의 문병을 가게됐다. 폐암이라고 했다. 깨끗한 1등 입원실인데도 환자로 말미암아 그 안의 모든 것들이 힘을 잃었다. 심지어 문병 온 꽃들까지도 함께 폐암에 콜록거리는 듯했다.

병실에 누운 그 집사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나는 우는 그분을 보면서 영생의 소망을 구하며 함께 기도했다. 기도를 마친 후 아무도 없는 사이에 그 집사님은 내 손을 꼭 잡으시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자기 눈물에 대한 해명을 했다.

죽기가 서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분의 나이가 59세나 되시니 그렇게까지야 서러울 것은 또 아니다. 재산이 아까워서도 아니라고 했다. 

그분은 딸만 네 명이 있는데 3명은 출가했고 한 명이 대학 졸업반인데, 아들이 없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처음엔 자기 병이 폐암인 줄도 몰랐단다. 그런데 문병을 온 딸들과 사위들이 흘끔흘끔 눈치를 보면서 한마디씩 하더란다. 아버님의 사업을 자기에게 맡겨 주시면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큰 사업을 이뤄 보겠다는 것이었다.

번갈아 가며 말하는 딸들과 사위들의 말 속에서 자기가 불치의 병을 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생각하니 정작 서러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너무도 각박한 인간의 욕심이라고 했다. 

딸들이, 사위들이 사랑스럽고 안타깝기보다는 꼭 자기 눈에는 난파당한 배 주위를 도는 상어들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눈물에 번진 집사님 얼굴에는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목사님, 이젠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가슴에도 싸늘한 바람이 휘이 휘이 몰아쳤다.

내 눈에도 눈물이 어렸다. 그 집사님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내가 인간인 것이 그렇게 고독하고 부끄러울 수 없었다. 나오는 길, ○○대학교부속병원 현관 앞에서 방긋거리는 장미들의 몸짓도 거짓 같았다.

그래, 가을이구나. 이 가을은 허무의 계절인가? 변절의 계절인가?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난파선 주위를 도는 상어처럼 보였다.

난 먼지 낀 안경을 벗어서 정성껏 닦아 다시 썼다. 그래도, 내 가슴 저쪽 한쪽에서 날씨보다도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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