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한 나날이다. 간 줄 알았던 가을은 아직 나무 끝에 위태로이 남았고, 오래 머물기 바란 이는 인사도 못 하고 밀리듯 떠났다.

그보다도 커다란 공허는 믿음이 사라진 자리서 자라난다. 사람과 사람 간 마땅히 기대하는 최소한의 믿음이 좌절된 자리. 움푹 패인 구덩이 속으로 팔을 뻗어 보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마침내 텅 비었다. 내가 아니라도 기사 쓸 사람은 많고, 내가 사라져도 세상은 잘 굴러가겠지. 아무도 읽지 않을 편지를 쓰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타자를 친다.

그러나 종이와 잉크를 낭비한단 점 말고 이 활자들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 "Nothing matters(전부 부질없어)."

다니엘 콴·다니엘 쉐이너트 감독 장편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서 멀티버스 속 수많은 차원을 초월한 절대강자 ‘조부 투바키(이하 조부)’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만이 자신이 깨달은 진리라고 말한다.

조부는 모든 선택 가능성에 따라 갈라진 무수히 많은 다중우주를 동시다발로 넘나든다. 그 속엔 운동선수가 된 조부, 배우가 된 조부, 검술을 익힌 조부까지 모든 종류 능력치를 갖춘 무한한 조부가 존재하니 그야말로 때에 따라 ‘모든 걸(everything)’ 하는 초월의 경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전부라고 생각한 모든 걸 손에 쥔 그에겐 허무만 남았다. 엄연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더 이상 이루지 못할 꿈도 없고, 후회도 없고, 욕망도 없는 상태니 말이다.

어쩌면 조부가 맞을지도 모른다. 광활하고 무한한 우주에서 우리는 어떤 변화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한 점 먼지에 불과한데 무엇이 중요하겠나.

그러나 그 공허의 끝장에서 이 영화는 겨우 ‘다정하자’고 말한다. "우리 스스로가 쓸모없고 작게 느껴질 무언갈 새로 발견하더라도, 그게 뭐든 좋으니 나는 여기 너랑 함께 있고 싶다"고.

그러니 당장은 옆에 앉은 동료들에게 안부를 묻고, 듣고 싶은 목소리를 향해 전화를 건다.

구덩이 같은 세상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 체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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