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는 항상 달리기 경주를 하면서 2등을 하다가 1등이 넘어져도 기뻐하지 말고 그대로 들어가지도 말라고 교육하셨다. 꼴찌를 하더라도 넘어진 1등과 함께 들어가라는 취지였다.

사실 대학생활이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극단적인 경우는 잘 없다. 어떤 경쟁에서든 앞서 나가는 경우도 잘 없었고, 나보다 앞서 나가던 사람이 넘어지는 경우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교훈은 항상 기자 뇌리에 박혀 생각할 거리를 남겼다. 무한한 경쟁사회에서 함께 들어가라는 내용이 심금을 울렸다. 지금 한국 사회가 무한한 경쟁의 산 증인이지 않은가.

기자가 중학생일 때는 피아노 학원과 태권도 학원처럼 취미로 해야 하는 활동을 경쟁처럼 배웠다. 고등학생일 때는 야간자율학습과 학원에서 성적으로 경쟁했다. 학생들을 성적으로 쭉 나열해 높은 성적 순으로 대학을 갔다. 

대학을 졸업한 후 취업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사가 성과 위주로 돌아가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 말하면 입이 아프다.

기자의 동생은 이런 말도 했다. "요즈음 유치원생들은 영어유치원, 국공립유치원을 가려고 대기 줄을 받고, 어르신들은 아플 때 좋은 병원에 가려고 대기 줄을 받는다."

동생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경쟁해야 하는 삶인 셈이다.

기자는 그런 경쟁이 싫었다. 지금도 싫다. 누군가 좋은 대학을 갔다면 누군가는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혹자는 경쟁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같은 등수를 받는다면 의미가 없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이 맞기도 하다. 어떤 환경에서든 높은 자리와 자원은 한정됐으니 모든 사람이 같은 등수를 받아 같은 자리를 차지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미 모든 사람이 같은 등수를 받는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 이뤄진 사회 실험으로 실패했음이 증명된 상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경쟁에서 뒤처진다면 인생에서 큰 타격을 받는 양 받아들인다. 사회의 시선도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들을 보며 즐거워하는 듯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한마디를 추가하고 싶다. 1등이 넘어져도, 그 누가 넘어져도 기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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