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소금은 한약의 감초처럼 사용하는 분야가 많은 재료다. 식품·전통장류·화학·농업·어업·무기·금속정제·약품·종이·염색·사진·성냥·소다·비누·화장품 등 수없이 많다. 

소금은 살균력과 방부력 역할도 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저장하는 식품에는 꼭 사용하는 재료다. 생선 종류에 따라 소금 사용량을 조절하는 염장 기술에 의해 생선 고유의 맛과 영양을 보존하고 결정하듯이 말이다.

소금을 원료로 하는 소다는 광물질과 지방질을 분해하는 작용을 한다. 금·은·동그릇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해 금속 본연의 색상과 광택을 내는 효능을 가졌다. 채소·나물을 삶을 때도 소금을 조금 넣어 주면 채소와 나물 색상이 보존되고 연하게 된다. 

염색에도 소금을 사용했다. 고분 벽화에서 볼 법한 화려한 복식에서도 선인들의 직물과 염색 기술 변모를 살펴볼 수 있다. 

신라에는 염궁·찬염전 부서가 있었다. 백제는 주부라는 부서가, 고려는 잡직서·도염서가 있었고 조선에서는 염장관이란 부서가 존재했다. 모두 소금·직물·염색 분야를 담당하는 전문 기술 집단이었다. 자연식물 쑥·할미꽃·치자·홍화·수수·동백·봉선화 등 수십 종의 식물과 황토가 염색 원료로 사용됐다. 

서양에서 소금은 결백·재능을 의미하며, 고대 유대인들은 손님을 환대하는 의미로 소금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소금은 순결·정결의 뜻이 있다고도 전해진다.

조미료의 왕자로 부르는 소금을 우리는 고대부터 사용했다. 나뭇잎에 바닷물을 묻혀 볕에 말려서 소금을 채취하는 방법도 있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바닷물을 그릇에 담아 끓이고 졸여서 소금을 채취해 사용하기도 했다.

식품·산업·공업용으로 소금 사용량이 늘어나면서 대한제국 시절에는 중국 산둥성 지역에서 천일염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1900년 초였다. 조선에서도 천일염을 생산하자는 제안이 재정고문실에서 나온다. 

소금을 자급자족할 방법으로 천일염전을 조성하자는 제안이었다. 평안남도 대동강 부근 광양만에 염전을 축조한 것이 시초였다.

목포와 무안에도 천일염전을 조성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서울과 거리가 멀다고 해 인천 주안에 천일염전을 조성한다. 1907년이었다. 지금의 부평구 십정동에 있었던 십정포구 건너편 주안 해안을 매립해 염전을 만들었다. 이후로 부산용호·함경도·평북·경상도·전라도·충청도 순서로 염전을 조성했다.

소금 수확기는 봄에서 가을까지다.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바닷물 만조 시간에 염전의 수문을 열어 해수를 염전에 가득 채운다. 염전 저수지에 가득한 해수를 증발지로 흘려보낸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 염전 바닷물의 염도는 25도의 함수로 농축된다고 한다.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면 염전의 해수가 결정화되며 소금이 생산된다. 날씨가 좋으면 소금 수확량을 일정하게 채염할 수 있다고 한다. 주안 염전 산하에 있었던 남동·소래·군자 염전에서도 품질 좋은 소금을 생산했다.

색상이 희고 결정이 잘 된 소금은 손으로 쥐어 보면 삭삭하고 중량이 가볍다. 불량 소금은 거무스름하고 맛이 쓰고 텁텁하다고 한다. 주안 염전에서는 염전을 홍보하기도 했다. 찾아오는 견학단에게 염전 구조와 채염법을 설명하는 전문 안내원까지 있었다고 한다. 매년 10월에는 염전 제례도 올렸다.

인천지역에 아직도 염전을 운영하는 곳이 있다면 산업유산으로 보존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며 자원이다.

천일염 제조 분야 기능인을 소금 명인으로 지정한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염려되는 점은 3~4년 후 우리 해역으로 스며든다는 일본의 핵 오염수로 인한 염전산업의 존폐 여부다.

고려국가는 몽고와 전쟁후 국가 재정이 부족하게되자 군사ㆍ경제ㆍ민생 등에 도움이 되고자 소금을 전매 정책으로 운영하기도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