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16세기 이래 지리상 발견은 바다에서 시작했다. 이른바 서세동점은 정치·경제·종교 등 여러 요인에 의해 진행됐지만 그 본질은 식민지 건설을 위한 진출이었다. 동아시아 3국에서 개항이 그토록 중대한 역사적 사실이 된 것은 3국이 모두 쇄국 상태로 문호를 닫고 있었기 때문이며, 중국-일본-조선 순서로 이뤄진 것은 지리적 위치에도 원인이 있으나 그보다도 서양과 가져왔던 접촉 기회와 깊이 순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각국 개항은 당시 세계사 추세로 보면 결국 조만간에 필연적으로 닥쳐올 현상이었으며, 늦어도 19세기 후반에는 어차피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는 게 오늘날의 역사 인식이다.

인천은 기원전 1세기 무렵 미추홀이란 이름으로 문헌상에 처음 등장했다. 미추홀은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의 근거지였다. 이후 3∼4세기 백제가 중국과 교류할 때 이용했던 등주(登州)항로의 출발지는 능허대였는데, 바닷길을 통한 최초 대중국 교류였다. 서방세계에 ‘꼬레아’로 알려질 정도로 국제 교류가 활발했던 고려 때 인천지역은 영종도 경원정의 유래에서 보듯 개성의 관문으로서 번창했고, 고려말에는 ‘칠대어향(七代御鄕)’이라 해 경원부로 격상됐다. 조선시대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17세 말에는 강화를 중심으로 육·해군 기지로 변모해 왕실 보장처로서 기능했다.

19세기 인천은 서양 세력의 침입을 막는 최전방으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주요 격전지가 됐다. 인천은 한반도 북부와 남부의 중간에 위치하며 육지와 해양을 연결하는 지역으로 한반도 중심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요충지였다. 따라서 평화 시에는 국제 교류 통로로서 번성했으며, 전시에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무력 충돌이 빈번했다. 이러한 인천 특성은 개항 이후에도 이어졌다.

개항은 보통 우호통상의 이름을 띤 조약 체결로 이뤄졌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제국주의가 내세웠던 ‘국제법’에 무지했던 약소국을 교묘하게 기만한 ‘불평등조약’이었다. 조선 개항의 단초가 되는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 체결 역시 조선사회가 근대로 이행해 가는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지만, 일본의 무력 위협에 굴복해 타율적 개국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에 침략 발판을 제공했다는 큰 한계를 지녔다.

그러나 근대 개항을 일본의 무력 위협이라는 측면에서만 고려한다면 일면적 파악에서 오는 부정확한 사실 인식과 타율적 역사관의 오류에 빠져들게 될 위험성이 내포됐다. 오히려 민족 내부에서 분출되던 대외 개방에 대한 욕구가 간과돼 민족 역사를 왜곡할 소지도 있다.

조선의 개항은 부산, 원산, 인천 순서로 이뤄졌다. 인천 개항은 앞 시기 개항과는 달리 일본만의 독식이 될 수 없었고, 서양에게도 개방하는 결과를 낳았다. 인천은 수도와 인접한 곳에 위치했다는 요인으로 식민지 교두보 확보를 꾀했던 제국주의 군대 그리고 선교 거점 확보를 탐색했던 선교사들과 외국 상인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인천 개항은 유림(儒林)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주동자 능지처참 같은 초강경으로 대응한 결과 개화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개항은 한국 역사 전반에 있어서는 ‘근대화’라는 발전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더라도, 조선인 희생을 담보로 해 이룩했다. 특히 개항 이후 각 개항장 사회는 급변해 상공업이 번창했다. 하지만 토착 지역인과는 별개였고, 토착 자본도 변변치 못했다. 개항장에서의 정치·경제 지배층으로 부상한 일부는 일제에 협력하고 부화한 집단이 주가 됐으며, 대다수 지역인들은 그들에 의해 수탈당하는 양상으로 전락했던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 영욕의 역사를 뒤로하고 해마다 새로워지는 인천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인천의 성장 동력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인천의 지정학적 요인과 오랜 세월 인천이 겪은 역사의 힘이 밑바탕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10년 뒤 인천 개항 150년에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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