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순 서울기독대학교 겸임교수
이상순 서울기독대학교 겸임교수

여주시에는 ‘여백 서원’이라는 이색 공간이 있다. 이곳은 2014년 서울대 전영애 독문과 명예교수가 미리 사 뒀던 땅에 한옥 몇 채를 세우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장서를 채웠다. 앞마당과 뒤뜰에는 직접 심고 가꾼 나무와 꽃들이 정원을 가득 메웠다. 

그는 각박한 세상에 젊은이들이 부대껴 마모되지 않기를 소망했다. 힘든 이들이 언제든 찾아오는 곳, 잠시라도 숨 돌리며 자기도 돌아보고 세상도 돌아보는 그런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천장을 가로지른 대들보에는 ‘맑은 사람을 위하여, 후학을 위하여, 시를 위하여’라고 적어 놨다.

전영애 교수는 2011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 학회로부터 ‘괴테 금메달’을 수상한 세계적인 괴테 연구자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년)는 독일어와 독일문학을 당대 세계문학으로 끌어올린 대문호(大文豪)이면서 정치가·과학자·철학자로도 활동한 근대 위인(偉人)이다. 

1885년 설립된 괴테 학회가 1910년부터 2년마다 주는 이 상(賞)은 전 세계 괴테 연구자들에게 노벨상 같은 최고 영예로 꼽힌다.

전영애 교수는 괴테 전집(全集) 번역·발간 작업을 벌이고 여백 서원 뒤편 산기슭에 2층짜리 ‘젊은 괴테의 집’을 완공했다. 그가 왜 40년 넘게 괴테에 빠져 있을까 라는 의문과 함께 자신의 600곡 가곡 중 70곡을 괴테의 시로 만들 정도로 괴테의 시를 좋아했던 작곡가 슈베르트가 떠올랐다. 

괴테는 문학가였지만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그가 지은 시는 약 200개 음악으로 작곡되며 음악사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괴테의 시를 바탕으로 작곡한 슈베르트의 대표 가곡인 ‘마왕’은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스카이 캐슬’과 송강호 주연의 영화 ‘마약왕’에서 테마곡으로 등장하는 등 많은 작품에 쓰인다.

‘마왕’은 북유럽에서 내려오는 요정 세계의 설화를 괴테가 재해석한 작품으로, 한 소년이 아버지 품에 안긴 채 말 위에서 숲을 질주하고, 마왕은 악마 같은 속삭임으로 소년을 유혹하고 소년은 겁에 질린다. 아버지는 아이를 지키려 애쓰지만,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아이는 죽었다는 내용으로 시종 피아노를 강타하는 옥타브 음형이 말을 타고 질주하는 긴박한 이미지를 만들고, 그로 인해 노래를 듣는 내내 긴박감으로 숨을 쉬기 어렵다. 시를 따라 음악을 이야기체로 풀어내면서 시와 음악이 하나로 결합돼 긴장을 극대화한다.

하지만 괴테는 음악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닌 암시적으로 드러날 것을 중요시 여겼다. ‘마왕’에서 말발굽 소리를 피아노로 표현한 데 대해 괴테는 음악에 동작이나 소리 그 자체를 표현한 방식들에 불만을 가졌다.

시의 음악적 변용을 꺼렸던 괴테는 슈베르트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중에 슈베르트가 사망하고 나서야 "시에 곡을 붙인 게 아니라 시 자체를 노래했다"며 슈베르트의 음악성을 인정했다.

슈베르트는 형식 속에 갇혀 있기보다는 괴테의 시를 읽고 느낀 순간의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괴테 정신의 정수(精髓)에 대해 전영애 교수는 "「파우스트」를 한 줄로 요약한다면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lange er strebt)’이다. 인간이 길을 잃고 방황한다는 것은 갈 곳, 목표, 지향점이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방황이 멈춰지고 자족과 정체(停滯) 그리고 안주(安住)가 일상화된 삶이라면 목숨이 붙어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끔은 ‘여백 서원’에 가서 괴테의 시로 된 슈베르트의 가곡을 들으며 여유와 관조(觀照)를 즐긴 시간 관리의 달인이었던 괴테의 정신을 되새기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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