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프랑스의 아시아 학회 도서관에서 소장 중인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고려대 박대재 교수가 찾아내 공개했다. 아시아 불교미술을 연구한 게티 학자가 탁본을 도서관에 기증해 소장한 것을 찾아낸 것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도 프랑스인 동양학자 샤반이 기증한 탁본이 있다고 한다. 서구 지역 학자들이 고구려역사를 연구했다는 물증이다. 1905년 광개토대왕비의 현장에는 연구자들 중에 서양인이 있었다는 여러 자료들이 확인된 것으로 보아 샤반 또는 게티 학자로 추정한다.

고구려 전성시대 북만주 수천리와 요동 칠백리는 분명 우리 영토였다.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찾으리라고 우리 선인들이 굳게 믿었다. 고조선에서 조선까지 우리 역사와 문화가 남아있는 지역이다. 우리 민족의 강인함을 보여 주는 유적과 유물이 많은 지역이다.

중국 중원지대 하남성~산동성~북경부근~몽고부근~만주대륙 지역은 고조선·동이 ·부여·고구려·발해 등 우리 민족이 활개 펴고 생활한 곳이다. 요동·요하·봉황·봉천·관전·홍경·회인·통화·개헌·길림·연길·용강·회춘·홍안·위원·관동·빈강·안동지역 모두가 우리 영토였다.

18세에 왕위에 오른 광개토대왕은 영락·태왕·호태왕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39세에 죽는다. 광개토대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아들 장수왕이 414년에 건립한 것이 광개토대왕비다. 장중한 문장과 필적으로 고구려의 위업과 문화를 표현한 광개토대왕비다. 비문에는 동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중국에 관한 역사적 기록 1775개 문자로 쓰였다. 

중국 집안현 동강평야에 잡초들이 무성한 들판 흙 속으로 반쯤 박혀있는 광개토대왕비였다. 그 누구도 관심이 없었던 들판 흙 속에 묻힌 큰 돌멩이에 불과했다. 1800년대 중반 지역 관공서 직원에 의해 발견된 후 중국 문물국 소속 학자들이 찾아와 살펴봤다.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광개토대왕의 비문이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우리 선인들이 예서체로 기록한 비문들 일부는 오랜 세월 풍파를 견디며 문자가 마멸됐다. 중국 학자들은 연구와 탁본하는 일에 나섰다. 일본학자들도 현장으로 찾아왔다. 우리는 신채호, 최남선, 이진희, 임창순 등과 관련 학계에서 연구해왔다.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은 중국인들이 처음으로 했다. 처음 탁본해서 판매한 사람은 초천부였다. 탁본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많았다. 탁본의 가격이 비쌌다. 

우리 학자들은 비문을 조작하고 파괴한 흔적들을 찾아내기도 했다. 일본 학자들이 일본역사에 흠집이 되는 문자들을 파괴하고 그 부분에 석회를 반죽해 도포한 것을 밝혀낸 것이다. 비문의 조작에 나섰던 일본학자는 쿠로이다, 이케나이, 토리이 등이었다. 

일본의 주장이었던 임나 일본부설은 허구라는 것도 밝혀냈다.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시기를 중국학자들은 4기로 나누어 본다. 1기는 1875~1882년, 2기는 1882~1900년, 3기는 1900~1902년, 4기는 1902~1937년이다.

3기에는 일본 동경대, 교토대, 큐슈대, 무에다가 탁본을 했다. 4기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요오마모루, 나이후지가 탁본을 했다. 일본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탁본 중에 가장 오래된 1883년도 것이 동경 국립박물관에 있다.

만주 대륙 고구려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의 중심지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에 중국정부는 1928년 정자를 건립했다. 1983년에는 보호구역을 넓히고 새롭게 정자를 건립했다. 중국은 광개토대왕비에 관한 노래와 음악을 1895년에 제작해 놓았다. 

광개토대왕비와 주변의 고구려 유적으로 여행을 다녀오면 우리 역사에 대한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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