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한국 법제는 일본 법제의 지대한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해방 직후 독립국가 체제를 갖추기 위해 신속히 법제를 마련하는 일은 간절한 과제였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서구의 근대 법제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춘 법률전문가 내지 지식인이 부족했기에 급한 대로 일본 법제를 본떠 신속히 입법을 진행해 국가체제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헌법·민법·형법 등 다수 법들을 일본법 내용과 동일 또는 유사하게 입법했다.

이처럼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왜 일본 법제를 본떠 한국 법제를 마련했느냐"고 무작정 비판하기는 어렵다. 생각해 보면 일본 법제를 본떠서라도 신속히 우리 법제를 마련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국가체제가 형성되고 근대화 기초가 형성됐다고 볼 수 있기에 나쁘게만 생각할 수는 없다.

문제는 해방 이후 거의 80년이란 세월이 지나도록 지금까지도 일본 법제의 후진적 영향을 그대로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일본 법제는 서양 법제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지만 그 내용 중에는 서양 법제와 불일치하거나 후진적 내용들이 일부 포함됐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정치인·법조인 등 엘리트들의 보수적 성향이 강해 법제 개선에 적극 나서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한국이 일본보다 법제 개선에 더 앞선 사례도 있다. 예를 들면 ‘재혼금지기간’ 폐지 사례다.

과거 우리 민법은 대혼기간(待婚期間) 내지 과거기간(寡居期間)이라고도 불린 ‘여자의 재혼이 금지되는 기간’을 정했다. 이 규정(개정 전 민법 제811조)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여자는 전혼(前婚)관계가 종료한 날로부터 6개월을 경과하지 않으면 재혼할 수 없었다. 이 규정은 2005년 3월 31일 민법 개정 시 폐지됐는데, 그 이유는 "부성추정의 충돌을 피할 목적으로 여성에 대하여 6개월의 재혼금지기간을 두는 것은 차별로 비쳐질 수 있고, 친자관계 감정 기법 발달로 이러한 제한 규정을 둘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종래 민법 제811조 규정에 대해 "남성은 이혼하자마자 바로 다른 여성과 재혼할 수 있고, 여성은 이혼하거나 사별한 때도 6개월이나 기다린 후에 법적으로 재혼을 허락하는 것은 여성차별적이다"라는 비판이 있었다. 1998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 자문기구인 여성특별위원회에서 양성평등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규정 폐지를 요청했었고, 7년이 지난 2005년 법조문이 삭제됐다.

일본에서는 2015년 일본 최고재판소가 대혼기간을 6개월로 정한 민법 규정(제733조)을 위헌으로 판단하자 이듬해 대혼기간을 100일로 단축했다가 6년 만인 2022년 전면 폐지했다. 이 시대착오·성차별적 위헌을 폐지한 것은 한국이 일본보다 17년이나 앞섰다.

한국·일본에서 공통적으로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된 법규정들은 또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다. 서양인들이 한국과 일본에서 생활할 때 가장 이해가 안 되고 위험하다고 느끼는 점이 서양에 없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한국법과 일본법에서 뒀다는 점이다. 

우리 형법 제307조는 ‘허위사실’뿐 아니라 ‘사실(진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한 경우에도 처벌토록 규정하는데, 이는 일본 형법 내용을 그대로 베낀 데서 연유한 것으로 이해된다. 서양에서는 오직 ‘허위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한 경우만 처벌한다. 서양과 달리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만 ‘진실을 말한 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처벌토록 규정하니 합리적이라 볼 수 없고,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적 규정으로 봐야 한다.

‘재혼금지기간’처럼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도 한국이 일본보다 앞서서 조속히 폐지해야 한다. ‘진실을 말한 자’를 처벌하는 법규정을 존치하는 몰상식과 불합리를 해소해야만 국가와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한다. ‘진실을 말하려는 자’를 겁박해서 입을 틀어막는 일이 국가적으로 용인되는 한 민주주의 발전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