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최근 한국 사회는 ‘가치’ 아닌 철 지난 ‘이념’ 논쟁에 휩쓸렸고, 그것은 사회 전체 붕괴를 야기시킬 정도로 각종 분야에 영향을 끼친다. 식민지 생활 35년, 남북 분단과 사상자만 300여만 명이 발생한 ‘민족자살(nation suicide)’, 세계 최빈국 삶을 경험한 집단으로서는 불가사의할 정도의 현상이다. 인간사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가능하고, 또 그동안 만들어 온 민족성의 장점이면서 단점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도 이 현상을 분석해 원인을 찾고 해결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대부분의 이해관계와 갈등 경험에서 객관적일 수 있는 역사학은 모든 존재물, 한 집단, 특히 역사적 공질성이 강력한 소위 ‘민족(nation만은 아니다)’은 주변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 비우호적인 집단과 관계를 설정하는 일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절대적이기까지 하다. 내부적으로도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더욱이 계급과 신분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대외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민족모순이라고 말하며, 뒤에 말한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는 계급모순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행위와 평가 단위가 민족일 경우에는 전체를 민족모순이라고 묶으며, 대외모순과 계급모순으로 유형화시키는 게 바람직하다. 때문에 필자는 일제시대 민족주의 운동도 ‘우파 민족주의’와 ‘좌파 민족주의’로 구분했고, 역사학도 식민주의 사학에 대척점인 민족주의 사학을 ‘우파 민족사학’과 ‘좌파 민족사학’으로 구분했다. 물론 좌파 민족사학에 해당하는 건 공산주의 운동을 뒷받침한 유물사관을 말한다. 

일제시대에는 공동의 적, 공동의 비아인 일본제국주의를 척결하고, 일본에서 독립과 해방을 쟁취하는 전략과 전술에서 이 양대 흐름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판단한다. 물론 양 진영 갈등과 독립전쟁 역량이 분산·분열된 것은 분명 문제가 크지만,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흐름이 간과한 내용들이 있다. 대외 관계를 파악할 때 가해 당사국인 일본 문제에 집착해 다양한 현상들과 본질적인 문제, 특히 이미 세계화가 시작되고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으로 명명된 세계 질서의 움직임과 당시 조선의 지정학적인 상황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가진 함정들이다. 

하나의 주적이 아닌 위장한 다수 적들의 실체를 파악하려면 지정학적인 상황의 이해가 필요하다. 19세기 중반부터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국가를 완성시키는 한편, 유럽 세력과 미국 등의 해양 세력과 대응하려면 생존을 걸고 해양으로 진출해야 하는 지정학적 숙명이 있었다. 그 결과 러시아를 맹주로 하는 ‘대륙질서(Continental Order)’와 영국이 리더인 ‘해양질서(Marine Order)’ 간 본격 대결이 시작했다. 그때 동해 북부는 대륙세력의 출구이면서 해양세력의 대륙 진출 입구로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조우하는 현장으로 변했다. 

이 무렵 러시아는 흑해 일대뿐만 아니라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으로 진출을 시도했고, 해양세력인 영국은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러시아 병력과 국력을 동쪽 아시아로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는 일본의 이익과 일치했다. 거기에 태평양 세력으로 등장한 미국도 일본 주장을 지지했다. 

1894년 조선 지배라는 똑같은 목적을 가졌던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패배했고 멸망하는 중이었다. 러시아는 아관파천을 계기로 조선 침략을 본격화했다. 이로써 연해주 일대와 사할린 지역에 이어 조선에 대한 영향권과 자원 확보, 동아시아 주도권을 놓고 일본과 러시아는 충돌했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일본에게 ‘외교권’과 ‘국권’을 상실하면서 일본의 군사기지 노릇을 했다. 그 결과 조선은 전승국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한민족은 붕괴됐다. 

그렇다면 ‘조선의 운명’은 ‘제1차 세계화’라는 흐름 속에서 근대화 주역인 서양 세계와 이를 신속하게 수용한 일본이 개입된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결정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반도는 일본의 패망, 2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을 양대 축으로 삼은 ‘제2차 세계화’ 과정이 진행됐다. 다만, 이때는 이데올로기라는 외장을 한 채 진행되고, 이 Great Game은 ‘냉전(Cold War)’이라는 이름으로 한민족의 운명에 또 다른 족쇄를 채웠다. 그리고 한민족은 분열되고, 한반도는 분단됐다. 

이러한 결과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당연히 일반적인 상황에서 모든 1차적 책임은 자신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민족의 분단은 외세가 상당한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이후의 한국전쟁 등 과정을 보고 지정학적인 이해, 역사상(청나라, 러시아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고려하면 소련과 중공이 더 큰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분단의 근본 원인을 제공했던 일본과 판단에 오류를 범한 미국도 책임을 면할 길은 없다. 

역사학은 당시대인은 정보 부재로 알 수 없었던, 현재인은 경험이 없어서 알 수 없는 문제의 과정과 본질을 파악한다. 그게 역사학이 존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단, 전제가 있다. 특정 집단의 이익이나 권력 탈취, 이념 실현을 위해 왜곡·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지금 한민족은 19세기 말과는 또 다른 형태의 ‘세계화’와 새로운 ‘The Great Game’이 진행 중이다. 거기에 북한 정권의 현실성 있는 위협은 물론이고 ‘한반도 재분할론’이 중국 등에 의해 등장했다. 이러한 다급한 현실 속에서도 철이 지난, ‘민족자살’을 유도했던 이념 논쟁들이 격화한다. 우리, 또다시 붕괴를 겪을 수야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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