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얼마 전 새 휴대전화를 구입했다. 각종 개통 기능 점검 중 ‘통화 중 대기’라는 무료 부가서비스가 있었다. 통화 중 제삼자의 전화가 오면 뚜뚜 소리와 함께 문자로 알려 주는 기능이다. 지난 6년간 써 온 옛 휴대전화에서는 이를 전혀 모르고 지냈다. 평소 그리 많은 통화를 하지 않은 데다가, 당시 구입처에서 개통해 준 대로 별 불편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AI통역이라는 신기능이 탑재된 새것으로 교체하면서 이처럼 활용하지 못한 기능들이 상당했을 옛 휴대전화를 폐기하기에 아쉬움이 더 남았다. 

한데,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어서 적이 놀랐다. 아쉬움이야 나 혼자 일이지만 통화 중 걸려온 제삼자의 전화는 남까지 관련되는 일이어서다. 그동안 어떤 이들이 내 통화 중에 전화 걸고 답변을 기다렸으며, 아무런 반응이 없는 나를 몰염치한(漢)으로 원망했을까 생각하니 낯꼴이 붉어졌다. 여기서 ‘오해’와 ‘착각’이 뇌리에 클로즈업됐다. 전화 건 이는 나를 오해했고 나는 전화 오지 않았다고 착각한 세월들, 언짢았다. 오해와 착각의 반의어는 ‘이해’와 ‘정각’이다. 이해와 정각의 세상사가 바람직하지만, 우리 일상사에 그렇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가늠하기 쉽잖다. 

"…주변은 온통 착각의 홍수다/ 익히 듣던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 스러져가도/ 자기는 늘 살아 있을 것이라는/ 눈에 보이는 현상계의 물질만이 삶의 전부라는/ 이 수많은 착각 속에서/ 우리는 자기만은 착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그 착각 속에 살고 있다…." 내 졸음 장시(長詩) ‘망상과 착각’의 일부다. 

오해가 심해지면 망상으로 빠질 수 있다. 올 설날 귀성해 부모·형제와 상봉, 차례를 모시고 성묘도 했을 것이다. 핵가족화 시대인 요즘은 몇 안 되는 가족끼리 모여 명절을 쇠는 이도 상당할 것이다. 그런데 예전과 달리 실시간 소식을 알 수 있는 이 시대에 어인 일인지 촌수 가까운 친·인척 간에 소식 끊고 단절한 채 만나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이에는 종교관이나 성격 차이 또는 재산 문제로 인한 오해와 착각이 서로 미움과 불신의 씨앗으로 터 잡고 있을 수 있다. 어쩌면 남북한으로 갈라져 70여 년간 오매불망 상봉을 기다리는 이산가족보다 더 속 쓰릴지 모른다. 지금은 오히려 그런 친·인척보다도 취향, 직업, 동창회, 종교 따위로 수시 교류하는 커뮤니티 멤버들이 더 친한 세상이기도 하다. 

올해 또한 설날을 조촐히 보내면서 온 마을이 풋풋한 인정으로 넘쳐났던 어릴 적 명절 세시풍속이 새삼 그립기도 하다. 비록 가난했지만, 정분 두터운 친·인척들이 모여 이웃 어른께 세배드리고 정월대보름 밤 쥐불놀이로 왁자했던 모습들이 꿈만 같다. 

우리 번잡한 인간사에 오해와 착각은 없을 수 없으나, 이를 알았을 때 고쳐 살아간다면 그런 오해와 착각은 밉긴 해도 그저 봐줄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자신은 정각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할지라도 후에 착각으로 오해한 것일 수 있다. 오해와 이해, 착각과 정각이 뒤섞인 일상사, 이것이 우리네 평범한 여염가의 모습이다. 

그런데 오해와 착각이 ‘편견’과 ‘아집’으로 굳어져 이른바 확증편향으로 고착되면 사회적 해악으로 커지기 십상이다. 작금년 실체적 사실관계를 벗어난 좌우 이념상의 극단적 확증편향 행위는 우리 사회 대립과 갈등의 주요인 중 하나다.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터 같다. 지난달 당일 투표에 당일 현장 수개표한 타이완의 총통선거처럼 우리 선거도 그리해야 부정선거 시비를 종식시킬 수 있다는 내 칼럼에 대해 현대문명의 편리한 기계 사용을 마다하고 수작업하는 건 원시시대 회귀라고 비난한 이가 있었다. 부정선거 시비를 알면서 그랬다면 좋이 보아 확증편향이요, 모르고 그랬다면 오해나 착각이다. 우리 정치 사회의 후진국 현상이다. 

천동설 중심에서 지동설 세상으로 바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처럼 유연한 사고와 공자의 화이부동 정신이 함께해야 할 때다. 이해와 정각-실체에 대해 잘 알고 바르게 생각하도록 힘써야 한다. 지난주 가랑비에 춘설이 난분분했다. 아직 병풍처럼 둘러싼 산등성이는 녹청백 수묵산수화로 아슴푸레하다. 입춘 지나 우수가 코앞이다. 고목 가지 끝에 애순이 눈뜬다. 시조 올린다.

- 움트는 소리 - 

겨우내 맺힌 씨눈
일어나는 소리들이
 
소우주가 달뜨도록
언 땅마저 녹이느니
 
올바로
잘 아는 세상
팡파른들 못 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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