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를 즐기는 계절이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15일 간판을 내걸 「하얀 방」(제작 유시네마)의 극장가 방문은 확실히 굼떠보인다.

지난 여름 휴대전화를 매개로 한 「폰」에 이어 인터넷을 따라 연쇄살인사건이 펼쳐지는 「피어닷컴」이 이미 차례로 관객을 훑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얀 방」은 불륜과 임신이 사건의 모티브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안병기 감독의 「폰」과 유사하고 살인의 망령이 인터넷 사이트를 숙주로 삼고 있다는 설정은 윌리엄 말론 감독의 「피어닷컴」과 닮았다.

속옷을 입은 채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던 여인이 갑자기 누군가의 습격을 받고 배가 임신부처럼 부풀어 오른 뒤 숨을 거둔다. 이어 못으로 철판에 새긴 듯한 글씨체의 타이틀 자막이 흐르며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방송국 다큐멘터리 PD인 한수진(이은주)은 사이버수사대의 엘리트 형사 최진석(정준호)의 일과를 밀착취재하면서 이상한 연쇄 살인사건에 접하게 된다. 피살자는 외상이나 타살 흔적이 없을 뿐 아니라 임신 경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임신한 상태로 숨진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인터넷의 마리산부인과 홈페이지에 접속했다는 것. 피살자의 지인은 "자기가 죽는 모습을 인터텟에서 봤다고 말하며 곧 죽을 거라고 했어요"라고 증언한다.

한편 수진도 같은 방송국 앵커 정이석(계성용)과 연인 사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곤경에 빠질 즈음 우연히 문제의 사이트에 접속하게 된다. 빛으로 가득찬 하얀 방을 본 그는 죽음의 공포에 정면으로 맞닥뜨리기 위해 첫 희생자가 발생한 오피스텔 1308호에 입주한다.

「Org」「Over Me」 「눈물」 「아쿠아 레퀴엠」 「정화되는 밤」 등 실험성 짙은 단편영화로 주목을 받아온 임창재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새로운 기법과 파격적인 영상을 유감없이 선보인다. 소리만으로 관객들의 머리털을 쭈뼛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장면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솜씨는 일품이다.

그러나 상업영화 데뷔무대라는 것을 너무 의식한 탓인지 등장인물의 관계설정이나 살인의 모티브가 지나치게 상투적이다. 더욱이 서사구조의 짜임새가 허술한 것은 장편영화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여겨진다.

관객들은 종료 자막이 올라오는 순간에도 범인의 정체와 살인의 의도를 눈치채기 어렵다. 아무리 머리 속에서 필름을 되돌려보아도 연쇄살인을 하나의 연결고리로 엮을 만한 단서가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엘리트 형사라는 진석이 사건의 핵심에 다가가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는 모습도 어설프게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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