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엽 ㈔글로벌녹색경영연구원 부총재
이경엽 ㈔글로벌녹색경영연구원 부총재

"시방 여릿여릿한 햇빛이 골고루 은혜롭게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고 있는데, 따져 보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무궁무진한 이 선물을 그대에게 드리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건만 내가 바치기 전에 그대는 벌써 그것을 받고 있는데 어쩔 수가 없구나. 다만 그 좋은 것을 받고도 그저 그렇거니 잘 모르고 있으니 이 답답함을 어디 가서 말할 거나." 생각할 여지도 없이 읽히는 박재삼 시인의 ‘햇빛의 선물’이라는 시다.

자연을 벗 삼는 일에 그냥 받는 것으로 여겨지는 햇빛에 대한 담백한, 그러면서도 주변에 한없이 널린 ‘선물’ 같은 중요한 것들에 대한 감사를 새삼 깨달아 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덧붙이자면 자연에 대한 경외 외에도 우리는 주위에서 마냥 흔하게 여겨져 선물로 인지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 것이라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너무 흔하고 진부해 햇빛 쬐듯, 공기를 마시듯,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개념들이다. 사랑, 용기, 지혜, 신뢰, 정의 등등 나열하기 힘들 만큼 많다.

몇 해 전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서점가를 강타했다. 개인이 스스로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향해 작은 노력을 하면 그런 개인의 신념과 가치를 함께 나누는 올바른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다는 맥락의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정직하지 못함과 불의에 대한 선이 점점 더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용기’나 ‘지혜’는 타고난 성품으로 외연적 작용을 통해 나타나지만 ‘정의’는 각자 개인의 의지가 바탕이 되며, 결국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게 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원칙과 합리성이 힘이 되는 세상에서 강자 논리는 보이지 않게 기준이 되고 실천의 시작점이 되며, 이는 바로 외적 판단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 문제다. 이런 면에서 보이는 현상과 실제 현실은 엄청난 부조화의 단초다. ESG를 논하는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이슈인 국제회계기준(IFRS)을 보자. 

미국은 이 제도를 도입하려다 규정에 맞추는 회계처리보다 원칙에 맞추는 원칙 중심이 투자자 보호 관점에서 비교·판단의 개연성이 크다는 이유로 수용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2011년 이 제도를 전면 도입했다. 기업의 회계전문인력, 독립적 외부 감사, 감독당국, 정책 등의 배경도 견고하게 자리 잡혀 우리나라 기업회계에 적합하리라 생각했다. 

문제는 ‘견해(見解)’라는 잣대로 회계처리 기준이 흔들리고 법리의 다른 해석, 의견 충돌, 처벌 문제가 지속적으로 노정됐다는 점이다. 결국 국제회계기준(IFRS)은 한국과 맞지 않는 회계기준이라는 이슈가 제기됐고, 원칙이라는 정당성 확보는 숫자를 통한 신뢰감으로 생성됨을 일깨워 줬다. 

정해진 규정, 원칙에 따른 보이는 숫자 해석에도 견해라는 이름으로 관점을 달리하는데, 보이지 않는 비재무적 요소들을 두고 ESG라며 가치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목적으로 경영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다.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가치를 목표로 정해 뛰는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 ESG 열풍은 확연하게 시들어 간다. 기준과 평가요소 가치를 정하는 정당성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근거에서 나온 것이다. 

원칙과 합리성이 사회적 합의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글로벌이라는 명분, 선점한 기준, 힘의 논리로 각자 개인 기업 경영 의지에 개입하려는 이 문제부터 풀고 이슈를 키워 가야 하는 것이다. 경영의 가치는 시작부터 통제나 법 테두리에서 생성됐기 때문이다. 

기업을 만들고 경영하며 수익 창출을 주도하는 핵심 주체는 당연 CEO다. 그래서 CEO의 용기와 지혜, 정의는 개인의 신념과 가치에 따라 천차만별이며, 그 차이를 공동선으로 키우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조장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지금의 ESG는 정은귀 교수 산문 책 제목 ‘다시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들’이라는 문구로 접근하는 게 마땅하다고 본다. 또 그러한 시기가 왔다고 본다. 

중대재해에 대한 전후좌우 인과관계와 책임 소재의 논법이 아직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가운데 막연한 기준과 원칙으로 마치 신뢰경영의 정의를 보여 달라는 지배적 권유는 살아 있는 생명체인 기업 경영을 통제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나마 ESG를 세계적 기준으로 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하는 개념으로 이어 가려면 CEO들에게 낮고 얕은 상징적 가치를 여러 채널을 통해 반복적으로 주지시켜야 한다. 그래서 정의로움에 대한 개인적 신념을 경영에 접목시켜 주는 매개 역할을 해야 한다. 글로벌 보고서 작성 요령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만의 한국식(K) ESG 체계와 보고서, 검증 역량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 훌륭한, 그렇지만 너무 당연한 선물 같은 기업과 CEO들을 격려하고 아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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