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경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사회학과
김수경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사회학과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인간의 사회활동과 그들의 삶 전체를 연극에 빗대어 표현했다. 고프만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지구별 극장의 어떤 무대 위 연극 배우인 셈이다. 이때 자신만의 사회적 가면을 만들어 내는데, 가면은 스스로에 대한 만족스러운 자아상을 기반으로 타인의 기대를 적절히 반영한다. 만들어진 가면을 쓴 배우는 사회라는 무대에 오른다.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흔히 말하는 백스테이지에서 가면을 벗고 잠시 숨을 돌린다. 그리고 다시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한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도 삶이라는 연극은 계속해서 고요히 흘러간다. 

최근 이사를 하며 그동안 본 연극과 뮤지컬 티켓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100장이 훌쩍 넘는 티켓을 한 장씩 정성스럽게 상자에 넣으며 그것이 나에게 가져온 변화를 생각했다. 처음에는 고작 서른 계단만 내려가면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게 신기했다. 무대 위에는 햇살 대신 조명이 내리쬐고, 과한 분장을 하고 독특한 옷을 입은 사람이 가장 현실적으로 보였다. 모두가 가짜를 진짜처럼, 비현실을 현실처럼 보이게 하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러니 그곳에 들어선 이상 나 역시도 그래야만 했다. 그 순간만큼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연극에 깊게 몰입했다. 

극장은 제4의 벽이 지켜주는 안락한 지하 벙커와 같은 곳이었다. 온갖 비현실적 요소가 난무해 현실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100분 남짓한 시간 가만히 쳐다보며 잠시나마 현실을 잊었다. 그렇게 힘든 현실에서 나를 지켜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곳에서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 

특히 작품은 적어도 하나의 분명한 주제의식을 담았는데, 그것이 비현실적으로 표현될수록 신기하게도 관객으로서 몰입은 더욱 쉬워졌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관극하고 현실에 복귀한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을 생각하게 됐다. 

무대 위 거친 몸부림 속에서 가장 정제된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내 삶에 적용했다. 마치 작품의 주제의식이 커다란 바늘이 돼 나를 완전히 관통한 듯했다. 내 몸 한가운데를 뚫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내가 살아갈 길을 조금 알 것만 같았다. 

살아가며 윤리 문제에 대해 고민하거나 가치판단을 내릴 때 내 안에 있는 어떤 작품이 움찔거렸다. 바늘이 나침반의 자침이 돼 준 것이다. 그때부터 연극의 힘을 믿었다. 연극은 어쩌면 세상을 변화시킨다. 연극은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이후 대학교에 입학해 곧장 연극부에 들어가 지금까지 세 편의 연극을 올렸다. 이제 그것은 나에게 완전한 현실이었고, 나는 세상과 소통하는 법의 일환으로 이를 활용했다. 작품마다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지냈다. 처음으로 올린 연극에서는 배우가 돼 정해진 대사 안에 내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상대방에게 전하는 방법을 배웠다. 두 번째 연극에서는 연출을 하며 함께 공연하는 사람들에 대해, 세 번째 연극에서는 스태프로 무대 바깥에서의 조금 더 현실적인 면을 알게 됐다. 

제4의 벽을 넘나들며 연극을 하다가 느낀 점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연극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고프만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연극하는 삶을 사니 같은 무대에 선 동지로서 조금 더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하지만 이 또한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의 호소처럼 들릴 수 있겠다. 그럼에도 나는 모두가 연극 자체를 알고, 자신만의 ‘인생작’을 만났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삶을 집요하게 파고든 하나의 작품은 배우의 훌륭한 가면이 된다. 나는 그저 본인의 삶을 잘 가꿔 우리가 선 이 무대가, 우리의 연극이 조금 더 풍요로워졌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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