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순 서울기독대학교 겸임교수
이상순 서울기독대학교 겸임교수

민족 최대 명절인 음력 1월 1일 설날에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해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하고 떡국을 먹었다. 음력 1월 1일인 설날이 양력 1월 1일로 공식적인 ‘설날’이 된 건 을미개혁이 이뤄진 1895년으로, 태양력을 사용하면서 1896년 1월 1일을 ‘설날’로 지정했다. 그러나 구한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설날’이기에 일반인들은 양력설에 강한 이질감을 느끼며 여전히 음력 1월 1일을 설날로 여겨 조상에 제사를 드리고 어른들에게 세배를 한다.

해방 이후 분단의 아픔으로 고향에 가지 못하는 실향민을 노래한 채동선 작곡 ‘고향’이 떠오른다. 아마도 같은 멜로디로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님은 아니 뵈네’로 기억하기도 한다. 

채동선이 정지용 시로 처음 작곡한 ‘고향’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 산 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작곡가 채동선(蔡東鮮, 1901~1953)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서 태어나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독일 슈테른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배웠다. 조선음악가협회가 창립되자 현제명, 홍난파 등과 활동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현악 4중주단을 결성했다. 채동선은 한국전쟁이 터져 피란길에 나서면서도 자신의 악보들을 항아리에 담아 땅속 깊이 묻어 간직했다. 그러나 피란지 부산에서 병을 얻어 1953년 53세에 악보들이 발표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은 ‘향수’, ‘고향’, ‘백록담’ 등 유명 시를 쓴 국민 시인이다. 그는 시인 이상과 ‘청록파 시인’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을 등단시키기도 했다. 1923년 휘문고보 졸업 직후인 그의 나이 22세 때 고향에 대한 애틋한 정을 표현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라고 시작되는 ‘향수’를 작시해 1927년 3월 ‘조선지광’ 65호에 발표했다. 그 시대 문단을 풍미했던 김기림은 "조선 신시사상(新詩史上)에 새로운 시기를 그은 선구자이며, 한국의 현대 시가 정지용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당시 채동선은 12편의 가곡을 작곡했는데, 그중 8편이 정지용의 시를 가사로 할 만큼 그의 시를 매우 사랑했다. ‘고향’은 정지용이 1932년 7월 동방 평론 4호에 발표한 시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납북된 정지용의 시를 가사로 썼다는 이유로 전쟁 후 금지곡이 됐다. 하지만 이미 중·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린 상태였고, 당시 출판된 명가곡집 등에 수록돼 각 출판사들이 가사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1950년에는 박화목 작시 ‘망향’으로 그 가사를 대신하고 1960년에 이관옥 작시의 ‘고향 그리워’, 그리고 1964년 채동선 타계 12주기에 맞춰 유족들이 이은상의 작시 ‘그리워’로 바꾼다. 

이후 1988년 마침내 정지용의 시가 해금되면서 ‘그리워’, ‘망향’은 애초 제목인 ‘고향’을 되찾는다. 분단의 아픔 때문에 탈북 시인이라는 이유로 같은 곡이 네 편의 시로 바뀌어 불리게 된 것이다. 

명절 휴일에 가족 모임조차 점점 사라져 간다. 고향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사는 실향민들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가까이 있는 가족을 명절에 만나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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