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운 인문공동체 책고집 공동대표
강태운 인문공동체 책고집 공동대표

유학을 마치고 조명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 이야기입니다. 국내에는 자기가 원하는 분야를 배울 수 없다며 비행기에 몸을 실을 만큼 자기 색깔이 분명한 친구입니다. 친구는 새침한 척하지만 잠시만 같이 있으면 소탈을 넘어 털털한 성격을 숨기지 못합니다. 조명 컨설팅은 특성상 현장 근무가 잦습니다. 사무실과 현장을 오가며 설계한 디자인이 마지막으로 연출되기까지 조명 선정부터 실내장식 전반을 총괄합니다.

건설 현장을 누비던 친구는 여자가 겪는 낯선 어려움을 종종 토로했습니다. 먼지 자욱하고 위험이 도사린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고 늦은 시간까지 자기 차례를 기다렸을 친구를 생각하니 안쓰러웠습니다. 그런데 친구에게는 이런 극한 환경을 이겨 내는 동기가 있었습니다. 조명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실내를 채운 불빛 알갱이들이 날갯짓을 시작하면 날갯짓은 하나의 바람이 돼 자신을 감싸옵니다. 그 바람에 안겨 자신의 상상이 현실이 되고, 그 순간 피부 세포 하나하나가 빛과 연결돼 살아 움직이는 전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죠. 조명을 통해 자신의 진실을 알아버린 친구는 이상하게 바로 절망했다고 했습니다.

연꽃이 뿌리를 내린 곳은 진흙입니다. 친구는 바라지 않았지만, 자신이 어쩔 수 없는 현장 체질이라는 사실에 마냥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현장이라는 거친 상자에 가두는 것이니 말입니다.

친구가 발견한 진실은 외려 자기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절망이었습니다. 친구는 내게 그 상황을 이야기했지만, 실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이해하기 힘든 모순의 상황을 낯설게 바라봤습니다.

한동안 조명 컨설팅 경력을 이어 가던 친구는 운명의 개입으로 모순 같은 상황에서 벗어났습니다. 우연히 다른 분야로 자리를 옮긴 것이죠. 그 친구는 새로 옮긴 분야에서도 삶의 진실이 담긴 상자를 열고 희망과 절망을 같이 경험할 겁니다.

삶의 진실은 모순이라는 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는 외줄타기였습니다. 올라탄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쪽저쪽으로 흔들리게 하는 질긴 생물. 이쪽을 선택해도 결국 저쪽을 만나고, 저쪽이 무서워 이쪽을 멈추면 결국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 빠지는 것이죠. 떨림이 멈춘 정지의 순간은 어쩌면 모든 게 끝나는 순간입니다. 모순을 만나면 당혹스럽습니다. 실은 더 열심히 당혹스러워해야 했습니다. 몇 번 힘든 모순의 상황을 거치고 나면 젊은 날의 사랑과 증오 같은 풍부했던 내 안의 감정을 몽땅 지워 버리고 기계처럼 살게 됩니다. 우연과 필연이 섞인 삶의 왜곡은 불필요한 감정을 소모하게 하고 자신을 아프게 합니다.

내 편과 네 편, 밝음과 어둠, 당근과 채찍, 창과 방패 이렇게 세상을 절반으로 나누고 내 입맛에 맞는 쪽을 편애하는 것이 일상의 내가 했던 일입니다. 발버둥치면서 벗어나려 했던 사람은 사실 가장 의존했던 사람입니다.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직장은 눈보라를 피하게 한 우산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위에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나를 달리게 하는 동력이었습니다.

욕구를 동력 삼아 나는 희망을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희망을 투사해 쌓아 올린 탑은 되레 나를 삶의 무게에 짓눌리게 했습니다. 세상은 내게 왜 이토록 가혹할까요. 누군가의 의도된 연출이 아닐지 의심해 보지만 연꽃과 진흙에는 아무런 타의(他意)가 없습니다.

이렇게 창과 방패(矛盾) 사이의 연결고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편한 쪽을 선택해 걷다 보면 그 끝은 내가 눈길도 주지 않았던 불편한 쪽의 시작입니다.

모순은 인간이 숙명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양날의 모습을 하나의 자신 안에 통합하는 연습 무대였습니다. 외줄 위에서 허락된 선택은 뿌리 깊고 철갑을 두른 나무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흔들림의 무게를 확인하고 살아가면서 지지대를 세우는 일입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다른 나무들과 연대해 더불어 숲을 키우는 것이죠. 인생의 국면은 바뀌어도 모순이라는 외줄타기는 계속됩니다. 삶의 진실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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