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철 인천행정동우회 기획정책분과위원장
최계철 인천행정동우회 기획정책분과위원장

절창(絶唱)이라 하면 아주 빼어나게 잘 지은 시나 노래를 말함이나, 자기 가슴속의 절절함을 시나 글로 써도 절창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비겁한 마음을 뒤끓게 하는 절창이 세상에 한둘이 아니어서 의로움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지표가 된다. 

그 절창 중 하나를 꼽자면 사마천(司馬遷) 49세 때 친구 임안에게 주는 편지(報任安書)를 든다. 황제와 태자 사이에 벌어진 난(亂)에 연루돼 사형수 몸이 된 옛 친구가 궁형이라는 치명적인 죄명을 선고받고 4년이 지나 복권된 사마천에게 ‘당신이 다시 높은 지위에 올라갔으니 인재인 날 좀 구해 달라’는 편지에 답하는 내용이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태사령(太史令)으로 천문과 역법, 사서를 담당하는 관리였다. 그가 왕실의 봉선 의식에 배제당한 화를 이기지 못하고 3년 만에 사망하는데, 그때 아들 사마천은 38세의 나이였다. 아버지는 그에게 제2의 공자가 되라 했고, 천하의 역사를 꼭 기록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41세에 아버지 관직을 계승하고 몇 년이 지난 뒤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힌 장수 이릉을 한무제의 면전에서 변호했다는 이유로 거짓된 사실 유포죄라는 무망죄(誣罔罪)에 걸린다. 모든 중신들이 반역자인 이릉을 능지처참해야 한다고 했으나 오직 그만이 이릉의 충심과 용맹성으로 보아 훗날을 기약하기 위함이었을 거라고 옹호했다.

그 당시 형벌은 신체에 죄명을 문신하는 묵형, 코를 베는 의형, 발꿈치를 잘라내는 월형, 궁형(宮刑), 사형인 대벽 순이었는데 궁형은 생식기를 잘라내는 중벌이었다. 생식기를 제거하다가 목숨을 잃는 수도 부지기수였고, 대가 끊기는 것은 물론 살아 있어도 인간 이하 취급을 받아야 했다. 아무리 죄질이 나빠도 대벽의 형을 받으면 박수를 받았지만 궁형은 산다 해도 사람이 아니었다. 50만 전을 바치면 형을 면하는 조건이 있었으나 그의 처지에는 숟가락까지 내다 팔아도 턱없이 모자라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사마천은 스스로 치욕 같은 궁형을 택했다.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는 "태사공의 외양간을 지키는 노복 사마천이 재배(再拜)하여 아뢰는 바라" 하여 자신을 극도로 낮췄다. 선비가 겪는 화 가운데 탐욕보다 비참한 것이 없다며 욕심이 화를 부른다는 이치를 적었다. 그리고 하루에 9번씩 창자가 뒤틀렸다며 궁형을 받은 뒤 겪은 수모와 고통을 표현했다. 그가 변호한 이릉에 대해서는 이렇게 밝힌다. "이릉과는 잘 모른다. 집에 돌아가는 길도 다르고 술자리를 하며 우정을 나눈 일도 없다. 때마침 황제께서 부르시어 물으시기에 답을 한 것뿐이다." ‘쓰레기 속에서 기어코 살려 하는 까닭은 다하지 못하고 해야 할 일을 죽은 후에라도 문장의 빛이 후세에 드러나지 않을 것을 안타까이 여겨서’라 하는 대목에서는 비감도 느껴진다.

제2의 공자가 되라는 아버지 유언은 이(利)를 구하지 않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가르침의 실천이었다. 의롭지 않은 부와 명예는 뜬구름과 같다는 공자의 말씀을 사마천은 꿈에서도 기억했던 것이다. 

인간 한계의 수모와 치욕의 결과물인 사기는 70권으로 53만6천500자의 대역사서이며, 오늘날 사마천은 동양 역사학의 시조로 불린다. 조선말 다 쓰러져 가는 나라를 염려해 왕께 올렸던 매천 황현(黃玹)의 1만3천 자나 되는 언사소(言事訴)나 더 올라가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 또한 특히 공직자들이 새겨야 할 절창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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