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한국시조협회 고문
김락기 한국시조협회 고문

지난달 한 언론인에게서 두툼한 책 한 권을 배달받았다. 무려 500면 가까운 분량의 시사 칼럼집이었다. 그의 40여 년 기자생활 기간 열과 성을 다해 써 온 글들 가운데 1993년부터 2024년까지 사이에서 골라 실은 거였다. 한 언론사 주필의 처녀 서책인데, 이 칼럼 제목이 바로 그 책명이다. 제목에서는 매일 자성하는 자세로 기자생활에 임한 그의 언론관이 그대로 묻어난다. 이른바 권불십년(權不十年)이 연상되는 이 문장은 어쩌면 우리네 인생사에 해당되는 경구라 할 만하다. 

요즘 세상에는 마치 자신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인 양 권세와 치부와 명예욕에 빠진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국회, 대법원, 선관위, 검찰청, 행정부 따위 다수 전·현직 고위층들은 그들만의 부정과 비리의 별세계에 살고 있는 듯하다. 서민들의 삶은 안중에 없다. 반면 이 책에는 늘 세상에 대한 자숙과 겸양의 자세로 사는 저자의 혼이 배어 있다. 무자기(毋自欺)의 죽비 같은 그의 신념이 비친다.

이런 그의 글월은 질박하면서도 서릿발 친다. 통독하여 느낀 바를 적어 본다. 

첫째, 저자는 한 우물을 제대로 파 왔다. 물론 요즘은 타 분야와 소통하는 융합형 인물이 필요하다지만, 이것도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된 이후라야 그렇다고 하겠다. 예컨대 얼굴이 좀 알려지기만 하면 제 분야에 채 무르익기도 전에 정계로 진출하는 공직자나 언론인들을 본다. 이에 비해 저자는 기자 외길 네 번이나 강산이 변하도록 여전히 언론 현장에서 활동 중이다. 이는 ‘막힌 곳을 뚫고 굽은 곳 펴라’는 그의 책 서문에 잘 나타났다. ‘기자는 역사의 기록자다. 단순한 기록을 넘어 국정을 감시, 비판하며 역사 발전을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철학의 김형석 선생, 사회 개혁의 장기표 선생, 시조문학의 정완영 선생 같이 신문언론계의 빛과 소금으로 남으리라 여겨진다. 

둘째, 글발 전개가 공정하고 객관적이다. 언론에 따라 내용 사실 여부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념이나 정파적으로 한편에 치우친 경우를 적잖게 본다. 이즈음 확증 편향적이거나 가짜 뉴스로까지 오도되는 현실 앞에 시청자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더구나 생성형 AI 시대를 맞아 전자개표기의 조작 수치에도 깜빡 속아 넘어가기에 십상인 사회다. 그의 칼럼은 여야 좌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한국기자협회의 윤리강령 등 관련 제 규율에 알맞은 서술이라 하겠다. 

셋째, 인간 본령에 충실해 삶의 귀감이 되는 내용이다. 저자는 박학다식하면서도 동양학(東洋學)에 일가견이 있다. 동양고전 경구 인용이 꽤 보이는 바, 새겨볼 면들이 상당하다. 정치·법률·역사·도덕·불교·시가·국제관계 등등 어떤 분야에 관한 견해든지 쉬이 공감이 갈 정도로 설복력이 있다. 이는 이 책 맨 뒤 ‘동행에게 길을 묻다’라는 후기 축문에서 잘 드러난다. ‘목탁(木鐸), 촌철살인(寸鐵殺人), 행동하는 선비,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깃대, 정론직필(正論直筆), 유능제강(柔能制剛), 연륜과 삶’ 같은 여러 사람의 표현에서 보듯이 평소 자신을 낮추고 상대편을 배려해 온 저자에 대한 주변인들의 솔직한 반응이 아닌가 싶다. 

이제, 이 책을 내 책상머리에 두고 틈틈이 보면서 음미코자 한다. 저자의 아호(雅號)인 ‘녹명(鹿鳴)’과 함자(銜字) 중 ‘린(麟)’에 각각 사슴(鹿)이 들어 있다. 아호 ‘鹿鳴’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서정시이기도 하다. 사슴이 울음 소리로 동료들을 불러모아 함께 풀을 뜯듯이, 저자는 이웃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명운을 타고난 듯하다. 이에 머물지 않고, 그의 칼럼은 전 세계인이 다함께 풀을 나눠 먹는 자양분이 되길 바란다. 저자의 별호에 ‘학운(鶴雲)’이 있다. 학은 고고하고 사슴은 화애롭다. 내강외유, 이 별호가 들어간 내 졸음 축문 시조로 마감한다. 때마침 산기슭은 온통 진달래꽃 천지다. 진달래는 참다운 꽃, 참꽃이라 불린다.

- 鶴雲 筆鋒(필봉) -

속정 많고 올곧구나
날카로운 붓끝이여
 
구름 탄 학이 되어
세상 곳곳 살펴온즉
 
언론 길
사십여 성상
참꽃 활짝 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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