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철수 선인고등학교 교장
조철수 선인고등학교 교장

세월호 사고 날짜는 2014년 4월 16일이고, 희생자 수는 304명이다. 여기에 날짜를 하루 더하고, 희생자 수를 하나 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고 다음 날 돌아가신 것으로 추정되는 한 분의 희생자를 더 기억하기 위함이다. 그분은 당시 단원고 수학여행단 인솔책임자였던 고(故) 강민규 교감 선생님이다. 

고인은 사고 당일 구조됐으나 다음 날 실종됐으며, 그 다음 날 극단적 선택을 하신 채로 발견됐다. 당시 인솔책임자였으니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을 지는 게 마땅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하게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는 한 공직자의 책임을 축소하거나 비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공식적인 희생자에 포함되지도 못했고 당연히 ‘순직’이 아니라 그저 ‘공무상 사망’으로 처리된 한 교육자의 죽음을 조금은 더 자세하게 살펴보려 함이다. 필자는 사고 직후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아니 ‘앞으로 처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했다. 당시 심정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기도 했지만, 필자도 이후에 그 일을 담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현실적인 물음이기도 했다. 그 결과 내린 생각은 ‘No child left behind’ , 내 뒤에 학생이 한 명도 없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문구는 2002년 미국 연방의회가 승인한 교육법령의 이름이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교육에 대한 연방정부 역할을 확대하고 미국 내 모든 공립학교에 대해 일정 수준의 학력을 유지하도록 요구한 법을 발의했다. 2009년 이명박 행정부는 ‘뒤처지는 학생 없는 학교 만들기’로, 2024년 인천시교육청은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으로 유사하게 이용했는데, 오히려 필자는 재난상황이나 단체를 인솔해야 하는 상황에서 떠올려야 할 가장 적합한 문구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 이듬해 3월 교감으로서 수학여행단을 인솔해 제주도에 갔다. 부장교사에게는 맨 앞에서 가이드와 함께 인도하라고 하고, 학생들에게는 필자보다 ‘뒤에 있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렇게 하니 목적지에 필자가 도착하면 모두 도착한 셈이어서 인원 파악도 한결 쉬웠다. 

재난에 대비한 매뉴얼은 많지만 정작 급한 상황이 되면 누구든 당황하기 마련이다. 세월호 사건이 나던 해, 교육부에서 근무하던 필자는 안산 화랑유원지에 있던 세월호정부합동분향소에서 추석날 당직 근무를 하게 됐다. 사고 이후 첫 명절이었다. 이른 새벽이기도 하고 냉방장치 때문이기도 했지만, 몸과 마음은 그야말로 춥기 그지없었다. 수많은 영정들이 놓인 제단 앞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심정으로 머리를 한참 숙였다. 

강 교감 선생님은 유서에 "200명의 생사를 알 수 없는데 혼자 살기에는 힘에 벅차다. 나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 달라. 내가 수학여행을 추진했다. 시신을 찾지 못하는 녀석들과 함께 저승에서도 선생을 할까"라고 적었다. 교직을 천직이라고 생각이 있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말씀이다. 필자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소명의식이다. 

2018년 고인의 유족은 "강 전 교감은 세월호합동분향소와 4·16기억교실, 세월호 참사 4주기 합동 영결·추도식에 희생자로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며 "강 전 교감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로 기억될 수 있게, 그의 마지막이 떳떳하고 명예로울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국민청원을 제기했다. 2016년 1월 공무원연금법 개정으로 기존의 ‘공무상 사망’은 ‘순직’, ‘순직’은 ‘위험직무순직’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이에 따라 당초 공무상 사망이었던 고인은 ‘순직’으로 처리됐지만 ‘위험직무순직’으로는 인정되지 못했다. 제도적으로는 인정하지 못할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제도적 지침들이 제대로 지켜졌다면 그날 그 바다에서 그런 사고가 있었을까? 생전에는 제도적 장치가 허술해 보호받지 못하고, 사후에는 제도적 장치가 강고해 보호받지 못한다면 그 억울함을 누가 달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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