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조선은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과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은 뛰어난 과학기술을 가지고도 혹여 남이 알세라 필사적으로 기밀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문명사의 서글프고도 위대한 그늘이었습니다.” 조선 땅에 대한 역사와 사상을 소재로 삼은 장편소설 `풍수'(전 3권)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던 작가 김종록(42)씨가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의 극적인 삶을 복원한 장편소설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랜덤하우스중앙·전 2권)를 내놓았다.

동래 관기의 아들로 태어난 노비출신 장영실은 갖은 박해를 받다 세종에게 발탁돼 종3품 대호군의 벼슬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그는 궁중과학자로서 두 차례나 중국에 유학했고, 측우기와 해시계를 발명하는 등 세종과 함께 조선의 독자적 과학입국과 문예부흥기를 이끌었다.

소설은 세종의 총애를 받던 장영실이 어느 날 작은 실수 때문에 왕에게 버림받아 초야에 묻힌 것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장영실은 1433년 세종 15년에 한양을 중심으로 조선의 하늘을 독자적으로 관측한 별자리를 돌에 새겼습니다. 당시 막강한 제국이었던 중국과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할 때 조선의 독자적 역법과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독립선언서와 다름없는 기념비적 사건이었습니다” 장영실이 당시 돌에 새긴 조선의 천문도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덕수궁 궁중유물 전시관에 있는 `천상열자분야지도'는 1395년 태조 4년 12월에 새긴 것이고, 조선이 1687년 숙종 13년에 다시 돌에 새긴 천문도의 원본도 태조 4년 때의 것이다.

장영실이 세종에게 버림받은 것은 조선의 독자적 천문도에 대한 중국의 강력한 견제 때문이라고 저자는 본다. 오늘날 강대국들이 약소국의 핵이나 대량살상무기에 대해 사찰하고 무력으로 견제하는 것과 같다. 소설은 이런 관점에서 15세기 과학문명을 꽃피운 세종과 장영실의 삶을 실감있게 복원해낸다.

저자는 “걸출한 과학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과학기술의 융창을 봤던 조선은 이후 동아시아와 세계문명사를 주도하지 못하고, 조선후기 북학파가 등장하기 전까지 철저히 마음을 다스리는 이론인 심성론에 경도됐다”면서 “이런 까닭에 소설에서 장영실의 삶을 비극으로 끝낼 수밖에 없는 것은 씁쓸했다”고 말했다.

유년시절부터 고천문학(古天文學)에 매료됐던 저자는 10여년 전 천문소설을 구상했다가 탈고했던 3천장 가량의 원고를 불태우는 등 곡절을 겪었다. 그는 한동안 소설 쓰기를 중단하고 동중서의 천인감응론, 주자의 이법천관, 동학의 인내천 사상, `주역' 등 철학적 탐구에 빠져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천체망원경을 메고 사막으로 떠났다. 고비와 애리조나사막을 헤맸는가 하면, 바이칼, 히말라야, 티베트 등지를 떠돌다가 이번에 소설을 완성했다.

저자는 “장영실은 생몰 연대가 정확하지 않는 등 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주변을 파 나가는 양각법으로 삶을 형상화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무용담을 내세운 활극과 멜로물이 난무하는 시절에 철학과 과학정신을 말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저자는 `풍수'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에 이어 천지인 삼재사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오다선생 행장기'를 곧 마무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독선에 빠진 노회한 권력자가 티베트 수미산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을 추리소설 형식으로 담아낼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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