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1년 중에 5월과 6월만큼은 충효(忠孝)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바쁜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부모·자식·스승·나라에 대한 마음을 이때 만큼은 기념행사(?)가 겹쳐 있다보니 돌아보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과연 이 시대의 진정한 효(孝)와 충(忠)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최근 신문지상에 종종 등장하는 현상 중의 하나가 불합리하거나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해결하려는 경향이다. 부채문제, 가정불화, 애정문제, 신병비관 등등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러한 이유로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리는(?) 것은 물론 가족이나 타인에게 전가시키거나 심지어 이해관계가 없는 불특정인을 향한 분풀이성 보복으로 까지 진행되는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표출되고 있으니,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그 해결책은 고민하고 있는 것인가?

더구나 해외이민, 조기유학, 원정출산 등이 사회문제가 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고, 이에 따라 예견된 결과지만 최근에는 이중 국적취득과 군입대 문제에 따른 국적포기 등의 보도를 접하면서 너무도 달라져 버린 세태와 우리 사회의 무감각해진(?) 반응에 문득 충효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된 사회현상의 보다 근원적인 것은 사회적 지표나 방향성 상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지표 상실을 초래하는 원인은 바로 국가관, 교육관의 부재, 사회적 책임의식의 결여로 연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사회의 가장 기초단위라 할 수 있는 가족도 서로 간에 신뢰를 상실하면서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문제를 원인삼고 있지만,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외면하는 혼돈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충효의 의미는 굳이 따로 구분하질 않고 같은 개념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충에 비해 효는 좀더 본원적인 것이며, 충은 효에서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파생적 관계 외에도 어버이는 작은 천하의 임금이요. 군왕은 확대된 가족의 어버이라는 논지에서 충효일치(忠孝一致)라는 사상적 개념이 형성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공자도 효가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정의해 그것을 인간 도덕행위의 근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충효사상이 집단을 중시한다는 경향성으로 다소 비판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나, 동양사회에서는 사회통합과 국가의식을 공고히 하는 중추적 사상으로 인식되어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내려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역사 속에서 충효가 중시되었음은 일찍이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세속오계(世俗五戒),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자료에서 찾아지는 당시인들의 의식은 무엇보다 충(忠)과 효(孝)라는 방법론을 통해 자신을 희생하고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6~7세기의 신라는 삼국간 전쟁의 소용돌이에서도 충효사상을 내세워 국민적 단합을 이끌어냄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루어 내었으니 `삼국사기' 김유신전은 바로 당시인들이 지향한 충(忠)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또 8~9세기 경에는 기근, 홍수, 가뭄 등 자연재해가 빈번하고, 여기에 도적들까지 창궐해 굶주린 일반인들은 유랑·걸식하거나, 멀리 중국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가기도 하고 심지어 자식을 팔아 연명하는 현상도 나타나는 등 그 궁핍함이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도 `삼국유사'에 보이는 향득(向得)이라는 인물처럼 병든 부모를 위해 할굉공친(割股供親)하거나 늙은 어미를 위해 노비가 되면서까지 봉양하는 효녀 지은, 노모의 끼니를 걱정해 자식을 땅에 묻으려다 오히려 쇠종(鍾)을 얻는 손순(孫順)의 일화는 비록 도덕적인 교훈을 위해 강조되었다지만, 당시 어지러운 사회를 이겨낼 수 있는 효(孝)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모습은 이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성리학사상이 체계화되면서 정치적·사회적 규범이 되고, 철학적·이론적 기초를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효(孝)의 모습이 선조들의 그것처럼 머리카락 한 가닥도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함부로 손상시키지 말아야 한다거나, 국가에 대한 충(忠)이 신라의 화랑들처럼 나라를 위해 몇 번이라도 전장으로 나아갔던 멸사봉공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단지 그러한 몸가짐과 정신력만은 잊지 말자는 이념의 계승인 것이다.

개인적인 문제이든 사회적 문제이든 그 나름의 원인과 이유가 각인각색이고, 당사자가 겪는 복잡한 상황과 심경이야 이루 헤아릴 수 없겠지만, 이러한 경험과 현상들이 과거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 오늘날까지 지혜롭게 넘겨왔던 선조들의 지나온 역사를 궁구(窮究)하는 것만으로도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까 싶다.

 

강옥엽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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