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린 시절 생각하면 모서리가 닳은 낡은 앨범 속의 빛바랜 흑백 사진들처럼 떠오르는 상념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살던 동네의 명물은 수문통(水門通)과 수도국산(水道局山)이었다.

수문통은 인천 앞바다의 바닷물이 들고 나는 길목으로 동네 골목마다의 개천이 모두 모여드는 그저 작은 배 몇 척 정도 드나드는, 말 그대로 수문통으로, 썰물 때면 바닥이 드러난 갯벌에 묶여 있던 작은 돛단배가 밀물이 되면 깊어진 수면 위로 떠올라 넘실대는 물결위로 출렁이며 바다로 데려다 줄 뱃사공을 기다리던 그런 곳이었다.

바람에 실려오는 찝찔하면서도 비릿한 바다내음과 인근 동네의 생활하수가 섞여 향기로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사정없이 후각을 파고드는 그 내음은 어쩐지 넓고 넓은 망망대해로 나를 인도해 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해가 져서 어두워진 다음에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그런 수문통을 세느강이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당시의 척박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자조적인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수문통 옆에 위치한 산이 수도국산이다. 당시에는 산이름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위 산의 정상을 제외하고는 산 전체에 사방으로 조그만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전형적인 달동네였다.

그 당시의 놀이 중에는 미국, 소련으로 편을 나누고 각 계급을 써놓은 쪽지를 가지고 서로 상대방을 잡는 놀이가 있었다. 상대방을 잡아서 계급을 확인한 결과 상대방보다 자신의 계급이 높으면 상대방은 쪽지를 빼앗기고 그 반대이면 내 쪽지를 빼앗기는 놀이었다. 물론 쪽지를 빼앗긴 사람은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하지 못하고 그 게임이 끝날 때를 기다려야 하는 괴로움이 있었다. 그래서 제일 높은 계급이 적힌 쪽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눈에 불을 켜고 상대방을 잡으러 돌아다녔고 비교적 계급이 낮은 쪽지를 가진 사람은 되도록 상대방을 피해 다녀야만 했다. 상대방은 누가 어떤 계급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없기에 낮은 계급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상대방에게 달려들면 상대방은 겁먹고 피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그와 같은 심리전에 더욱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이 놀이의 주 무대가 바로 수도국산이었다.

우리는 도망 다니거나 혹은 상대방을 잡으러 수도국산의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녔다. 낮부터 시작한 놀이에 해가 져 수도국산을 내려온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에는 서로 미국을 하겠다고 떼를 쓰기도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 놀이도 냉전시대의 산물이었던 것 같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수문통이 복개된 지는 이미 오래 됐고 최근에는 수문통과 수도국산 일대에 아파트가 건축돼 현재 옛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 아파트로 둘러싸인 수도국산의 정상에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 건립됐다. 이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어린 시절 소중한 기억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게 됐고 비록 어려운 시절의 추억이지만 그러한 추억이 있기에 나는 지금도 여전히 내 고향 인천을 사랑한다.

지금도 저녁 때만 되면 밥 달라고 동네를 한 바퀴돌며 대문을 두드리던 거지의 목소리와 얼굴이 눈에 선하다.

사실 그 동안 우리는 과거 우리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이를 내다 버리지 못해 발버둥을 친 적도 있었다. 우리가 가난에서 탈출해 그럭저럭 먹고 살게 된 것이 불과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너무도 쉽게 그 때 그 시절을 잊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이런 상황을 겪어 보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그 시절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결국 현재 나에게 있는 것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현재를 보존하려고 하는 것은 후대를 위해 우리들이 해야 할 의무이며 이를 통해 세대간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나중에 추억거리를 빼앗는 결과가 되고 그들의 인천을 사랑하는 마음도 그 만큼 엷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