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주의 끝자락이다. 서기력으로 따지면 2006년의 시작은 이미 한 달이 지났지만, 십이간지(十二干支)로 말하는 것은 음력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병술년(丙戌年)은 이제 시작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양력과 음력을 혼용해 편리대로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 양력 섣달그믐에 태어난 한 갓난아이를 두고, '올해 몇 살로 쳐야 옳은가'하고 벌였다는 나이실랑이 일화 역시 그러한 착오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어쨌거나 이번 주간에는 입춘도 들어있는데 갑자기 날이 추워지고 있다.

‘立春大吉’, ‘建陽多慶’

입춘(立春)이 다가오면, 우리네 조상들은 한해의 무사태평,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대문이나 기둥에 ‘입춘대길(立春大吉 : 입춘이 되니 크게 길할 것이요)’, 또는 건양다경(建陽多慶 : 따스한 기운이 도니 경사가 많으리라)이라고 입춘첩(立春帖)을 써 붙였다. 아파트, 다세대주택이 많은 요즈음은 어지간해서 찾아보기 어려운 봄맞이 풍경이다.

입춘은 동지가 지난 후 대지의 음기가 양기로 돌아서면서 모든 사물이 왕성히 생동하는 봄의 시작이자 24절기의 처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위축시켰던 매서운 동장군(冬將軍)이 물러날 시간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자연의 순리인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가가호호 붙은 입춘첩은 꽃피는 시절을 질투하는 동장군의 마지막 기승을 기꺼이 이겨낼 힘을 주는 역할을 했다.

올해는 설을 맞자마자 입춘을 맞게 되었다. 새해의 시작을 봄맞이 절기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각별하다. 상징적인 의미를 차치하고라도, 모처럼의 따뜻한 그믐밤 덕에 늦도록 음식 장만하는 부인네들의 고생이 위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그 중 하나가 아닐까?

TV속 어느 집 가장의 생밤 치는 손길을 바라보다가, 왜 밤을 반드시 차례 상에 올리는 지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밤은 우리 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다. 대추, 감과 함께 3대 과일 가운데 하나로 관혼상제 때에 쓰였다.  마을에 신작로를 내느라 뿌리째 뽑은 두 발 굵기의 밤나무뿌리에 싱싱하기까지 한 종자밤이 그대로 매달려 있더라는 이야기는 밤(栗)의 신비로운 생리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대단한 화젯거리가 되곤 한다.

다른 과실나무와 달리 밤은 싹이 나고, 뿌리를 내려 아름드리나무로 자라도 처음 심은 씨밤(종자)은 결코 썩어 없어지지 않고 뿌리에 계속 붙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밤나무를 근본(조상)을 잊지 않는 기특한 나무로 여겨왔던 것이다. 사당이나 종묘에 두는 위패를 밤나무로 만들고 반드시 제사상 위에 생률(生栗)을 올림으로써, ‘나’를 존재케 해 준 조상을 기억하고, 궁극적으로 생명력 있는 ‘나 자신’을 더 귀히 여기도록 후손들에게 가르쳐 온 선조들의 참 지혜인 것이다. 전통 격식을 갖춘 통과의례라는 것이 적잖이 불편해 보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들여다보고 이해하고나면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어디 밤(栗)뿐이랴!

새해 벽두. 자연은 봄 가뭄을 해갈할 비도 내려주었건만, 먹먹하게 막힌 민초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줄 만한 나라 안팎 소식은 내내 가물기만하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을 통해 전통을 익히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노력이 우리에게 더 없이 필요한 때다. 삶에 여유가 없을지라도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는 그런 희망의 날들을 생각해 보자.

새순과 물오르는 봄의 기운을 느끼며, 각박한 아파트 대문이나 방문에 ‘立春大吉’, ‘建陽多慶’을 손수 써 붙여 가족들에게 희망을 느끼게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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