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8대 불가사이 중의 하나라고 말해왔던 이스터 섬의 거석, 원주민들이 ‘모아이’라고 칭하는 거대한 석상은 이제 불가사이가 아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벌판, 변변한 도구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 식인까지 서슴지 않던 이스터 섬은 원래 울창한 숲을 자랑하던 풍요로운 섬이었다. 1천100년 전 섬에 첫 정착해 번성한 부족 사이들이 벌인 석상 세우기 경쟁은 나무를 모조리 베어내게 했고, 외부에 원조를 청할 수 없던 이스터 주민들은 그만 나무와 문명과 조상의 기억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황폐해지고 만 것이다.

1722년 부활절, 우연히 섬을 들른 네덜란드의 탐험가는 주민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부활절을 의미하는 ‘이스터’로 섬 이름을 붙이곤 수십 톤에 달하는 석상을 어떻게 세웠느냐고 물었다. 원주민들이 석상들이 저벅저벅 태평양을 걸어왔다 대답하니 당시 백인들은 불가사이라 규정했을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최근 정밀해진 과학은 이스터 섬의 모아이와 황량한 풍경은 생태계 파괴의 비참한 결과라는 걸 일러준다. 카누를 만들 만한 나무를 모조리 베어낸 이후 고기잡이에 나설 수 없던 이스터 섬 주민들의 후예는 지금 칠레의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지막 나무를 베어낸 주민은 당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문명의 붕괴』(김영사 2005)에서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어떤 학생의 진지했던 질문을 상기한다. 나무 한 그루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는 주민이 단지 석상을 옮기기 위해 마지막 나무를 베어내면서 ‘이게 마지막이구나, 나무가 다 사라지면 우린 배를 만들 수도, 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도 없을 텐데’하고 아쉬워했을까.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마지막 나무를 베는 사람은 이스터 섬이 울창했다는 기억을 하지 못한다. 어디 가나 황량한 섬에 나무가 드문드문 할 따름이었고, 나무 없다고 삶이 달라지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그런 현상을 ‘문명 기억상실’이라고 정의한다. 서서히 황폐해가는 자연에서 원래 울창한 숲과 그에 어울렸던 제 문명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현상, 척박해지는 삶으로 퇴행하는데 익숙해지면서 과거 찬란했던 삶을 잊고 마는 현상이라고 『문명의 붕괴』에서 진지하게 설명한다. 저녁 지을 때 필요한 나무 한 줄기 찾으러 사막을 반나절이나 걸어야 하는 에티오피아 시민들은 국토의 90%가 넘던 반세기 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사막이 점차 확장되는 중국의 인민도, 갯벌이 서서히 사라지는 인천의 시민도, 모래가 사라지는 해운대의 주민들도 제 문명을 망각할지 모른다.

겨우내 동면중인 개구리를 한 소쿠리 잡아온 오대산 청년들은 꾸물거리는 개구리들을 뜨끈뜨끈한 물이 담긴 대야에 들이부었다. 화들짝 놀란 개구리들은 변온동물인데도 영하의 날씨에도 달아나려 애썼다. 여름철이라면 벌써 튀어나갔을 것이다. 여름철, 시원한 물이 담긴 대야를 석유난로에 올려놓고 물 온도를 조금씩 올려보자. 대야 속의 개구리들은 서서히 오르는 수온에 익숙해지며 모두 차례로 죽어버리고 만다. 자신에게 익숙한 수온을 망각한 것이다. 마지막 나무를 잘라낸 이스터 섬의 주민들은 수온이 서서히 오르는 대야 속의 개구리처럼 자신의 문명을 잊고 말았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자신이 저지르는 생태계 파괴로 문명이 서서히 붕괴되는 징후를 보이는데도 감지하지 못하는 지구촌의 주민들에게 경고한다. 외부의 지원이 없는 이스터 섬과 지구의 운명은 다르지 않다고 우리를 깨운다.

아토피성 피부병 환자가 점차 늘어나고, 암과 뇌와 심혈관 질환이 젊은층에 확산되는 현상은 지구에 전에 없던 물질이 증가한다는 걸 웅변한다.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석유 값이 조금씩 상승하는 것은 이산화탄소가 늘어나고, 여름에 에어컨을 춥게 가동하고 겨울에 외투 불편하게 만드는 에너지 고갈이 멀지 않았다는 걸 예고한다. 이럴 때 우린 내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정화되지 않는 물질을 자연에 내놓는 막개발과 핵발전과 생명공학으로 흥청거리며 문제를 피할 수 있을까.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며 오만해하다, 문명 기억상실로 빠져들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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