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정월이 다 지나갔다. 내일 모레 양력 2월 28일이면 음력으로는 2월 초하루가 된다. 정월을 봄의 시작으로 생각했던 조상님들대로라면 어느 새 봄의 3분의 1이 갔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엊그제 입춘 날 ‘입춘대길 건양대경(立春大吉 建陽大慶)’ 입춘첩(立春帖)을 대문 기둥에 붙이고 한해의 대길, 대경을 소원했었는데 훌쩍 한 달이 간 것이다. 경칩 무렵에 추위가 한 두 차례 더 닥치겠지만 이제 추워 본들 얼마나 추우랴. 우리 가슴에 봄은 이렇게 말없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점심 식사 후 동료들과 가볍게 걷는 공원길 산책이 아주 상쾌하다. 성급한 느낌일까. 겨우내 고요히 서 있던 벚나무도 단풍나무도 벌써 망울을 내밀듯 몸통과 가지들이 아주 촉촉해진 것 같고, 멀리 황해 바다 수평선이 더욱 눈부시게 멀고 아득해진 느낌이다. 월미도와 도크를 내려다보는 전망 마당에 웅기중기 앉아 맑은 공기를 쐬고 있는 산보객들의 옷차림도 그다지 무거워 뵈지 않는다. 봄은 이렇게 앞가슴을 풀어, 몸에 스미듯 오는 것이다.

새봄! 무엇이 이 눈부신 날들을 멈추게 하랴. 무엇이 이 거칠 것 없는 생명의 분출과 자유를 막으랴. 춥고 곤고했던, 겨울을 보내는 이 약동과 환희를 누가 감히 제압하랴. 어디를 둘러보아도 예쁜 새봄의 보랏빛이 숨쉬고 있고, 두근두근 노래를 준비하는 아이의 마음 같은 것이 보인다. 올해 자유공원의 새봄은 이렇도록 유난히 곱고 아름답다.

그러나 이 봄 속에 봄이 오지 않는, 어쩌면 영 오지 않을 것 같기도 한, 슬픈 모습의 우리의 얼어붙은 겨울 자화상이 남아 있다. 검푸른 제복에 방한모, 그리고 방패를 앞에 세운 채, 둘씩 짝을 이루어 계단을 지키고 도로를 경비하는 전투경찰들의 굳은 모습. 언제쯤 이 춥고 살벌한 겨울 자화상이 치워질 것인가. 물오른 나무줄기의 봄이 아니고 가슴을 트는 저 수평선, 출렁거리는 자유가 아닌 이 풍경은 왜 무엇을 위해 우리가 감수해야만 하는 것일까.

자유공원의 봄은 저들 젊은 경찰들이 언덕길을 다 내려간 그 다음에 진정 올 것이다. 계단에는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향기를 묻힌 바람이 쓸고 가는 그런 평화의 순간에야 비로소 봄일 것이다. 비둘기가 가끔 어깨에 내려앉는 모습 그대로, 망연히 월미도 쪽을 보고 선 그 자세 그대로 맥아더 장군이 있는 그 풍경이 곧 자유공원의 봄일 것이다.

군산(群山)의 은신처에서 라디오를 통해 인천상륙 소식을 듣고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인천과 맥 장군과 상륙작전은 우리 역사의 일부라는, 이 때문에 적어도 100년은 두어 두고 생각하고 따지고 곱씹고 해 보자는, 그래서 그때 가서 결론을 내 보자는, 지난 2월 10일의 시인 고은(高銀)의 말은 차라리 봄을 갈망하는 목소리였다. 전투경찰들은 아무 일 없었던 듯, 어서 공원에서 내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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