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건전한 윤리관을 가지고 있었고, 내 가슴속에는 일찍부터 신의 원리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평생동안 감각의 노예였다. (중략)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내 감각을 만족시키는 일이었다. 나는 여성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느꼈고, 항상 여성을 사랑했으며, 여성의 사랑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머리말 중)
 
`세기의 호색한'으로 불리는 조반니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1725~1798).
 
그는 스스로 다혈질적기질 덕분에 관능의 유혹에 대단히 민감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늘 쾌활했고,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했으며, 새로운 즐거움을 창안해 내는 데 아주 솜씨가 좋았던 자신이 항상 새로운 여자를 사귀고, 쉽사리 관계를 끊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기질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사노바가 쓴 `카사노바의 회고록' 전12권 가운데 재미있는 장면만 골랐다는 `카사노바 나의 편력'(전3권)이 한길사에서 나왔다. 
 
편역자 김석희 씨는 카사노바에 대해 “썩어서 냄새가 나는 치즈와 여자 냄새를 좋아했던 감각주의자, 미식과 포도주를 좋아했던 식도락가였다”며 “어느 누구보다도 여성을 사랑했지만 여성보다 자유를 더 사랑했으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았던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적었다.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배우의 아들로 태어난 카사노바는 파도바 대학에서 민법과 교회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군인,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했다. 사기꾼, 도박가, 호색가, 난봉꾼의 대명사로 알려진 카사노바는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18세기 문화를 체험했다.

카사노바는 마음에 드는 여성을 보면 망설이지 않고 말을 걸었다. 곤돌라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시골 소녀에게는 이런 말을 던졌다. “왜 그리 웃으십니까, 아름다운 아가씨? 당신의 고운 치아를 내게 보여주려고요? 베네치아에서도 그렇게 멋진 치아는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지요.”
 
카사노바는 그를 감시하고 있던 사법재판소에 의해 1755년 체포됐다.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위험인물로서 친구들을 사취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등 다양한 혐의를 받았다.  5년 형을 선고받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견고하다는 베네치아의 피옴비 감옥에 투옥됐을 때 쇳조각을 이용해 감옥의 바닥을 파내려 가다 발각되지만 두 번째 시도 끝에 탈옥에 성공했다.  하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름도 바꾸고 재판소를 위해 밀정이 돼 극장의 어두운 객석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음란한 행위'를 고발하며 굴욕의 시대를 보냈다.
 
보헤미아의 둑스 성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카사노바는 1798년 숨질 때까지 4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1791년 그가 쓴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있었다. “나는 이 회고록에 `고백록'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무것도 회개할 게 없으니까요. 당신은 내가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요!”
 
각권 486~501쪽. 각권 1만5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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