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홀스트의  '행성'을 녹음한 것은 이번이 두번째이다.
   
첫번째 녹음은 영국 악단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연주로 2003년 같은 EMI
레이블에서 발매됐다.
   
레코딩과 상관없이 래틀은 이 작품을 이전부터 수시로 연주했으며, 본인이 부클
릿에도 적었다시피 과거 대부분의 연주는 영국 악단과 함께였다.
   
래틀의 '행성'에 대한 애착은 단지 여느 영국 연주가들이 자국 작곡가에게 유달
리 특별한 열정을 보이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홀스트의 작품 내부에 숨겨져 있는 다양한 음향적 효과와 극적인 다이내믹은 21
세기 새로운 클래식 어법을 찾느라 고심중인, 타악기 주자 출신인 래틀의 취향에 상
당히 부합하는 바가 있다.
   
이번 가을 새로 발매된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녹음한 홀스트의 '행성'은 베를
린 필하모닉 홀에서 '별들의 향하여(Ad Astra)'라는 제목 아래 진행된 연주  실황이
다.
   
3월16-18일 계속됐던 이 시리즈는 단순한 홀스트의 작품 소개 이상의 의미가 있
다.
   
이는 전 상임 지휘자였던 아바도가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처음 시도했다가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해 그를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었던 현대음악 소개 프로그램의 궁극적인 연장 선상에 있는 콘서트였다.
   
홀스트의 '행성'에 래틀은 작곡된 이후 종종 홀스트의 작품과 짝을 지어 연주되던 콜린 매튜스의 '명왕성'을 추가하였고, 여기에 더해 네 명의 젊은 동시대 작곡가에게 천체와 관련된 작품을 위촉해 2부 순서로 진행하였다. 굳이 네 곡을 위촉한 이유는 4악장의 교향곡 양식을 의도한 것이었다.
   
아바도 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처럼 베를린 필이 직접 위촉한 작품이  연주되었다는 점과 객석이 3일 내내 전석 매진 사례를 기록할만큼 놀라운 호응을 얻었다는 점이다.
   
과거 연주 음반과 비교할 때 베를린 필의 '행성'은 보다 높은 피치에 자극적인 음향을 지향하고 있다.
   
필하모니아 악단과의 연주가 두툼하니 무게감 넘치는 저음부가 인상적이었던 반면 현악의 날렵한 반응과 투박한 멜로디 라인이 아쉬웠다면, 베를린 필의 연주는 단원들의 화려한 개인기로 이 모든 것을 확실하게 만회하고 있다.
   
관악기와 타악기의 활약이 돋보이는 '화성'과 '목성'이 평정하는 카리스마 사이로 더욱 매력적으로 돋보이는 것은 현이 주도하는 '금성'의 관능성과 아기자기한  '수성'의 재롱이다.
   
조용히 사라져가는 해왕성의 여운을 후배 작곡가 매튜스는  '명왕성'이란  제목 아래 '새로운 등장'이란 화두로 바통을 이어받고 있다.
   
홀스트의 작품이 어느 부분에서 끝나는지 파악이 안될 만큼 매튜스의 작품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조용한 여운의 뒤로 어둠의 장막 속에서 빠른 템포로 분주하게 재생을 준비하다가 급작스럽고 위협적인 등장으로 진행되는 스토리 라인은 '죽음을 통한 부활'을 의미하는 명왕성의 상징성에 분명 부합하며, 홀스트의 본래 작품 성격과도 크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홀스트의 '행성'이 천체들이 가진 원형적, 신화적인 상징성을 의도하고 쓰인 작품인 반면, 새롭게 위촉된 작곡가들의 천체 음악들은 20세기 이후 현대인들의  하늘을 바라보는 시각이 보다 즉물적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각 작품들은 모두 과학적인 관측의 결과(사리아호/토타티스,  터니지/세레스) 내지 우주 개척의 과정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고(딘/코마로프의 추락)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첫곡 사리아호의 작품과 마지막 딘의 작품은 음의 실험을 넘어서 우주의 신비한 이미지와 역동성을 표현해 실황당시 베를린 필 청중들로부터 가장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번 음반을 통해 아바도가 베를린필과 함께 했던 개척자적인 시도가 헛되지 않았음을 래틀은 다른 각도로 보다 부담스럽지 않게 보여주고 있다.
   
아바도 당시 실험적 시도에 그쳤던 다양한 접근을 래틀은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
갈 전망이다.
   
그 두 번째 사례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다음 신보로 쥐스킨트 원작을 영화화한 '향수' OST가 기다리고 있다.
   
가장 대중적인 취향이라 할 수 있던 카라얀 시절에도 찾아볼 수 없었던 베를린 필의 영화음악 녹음의 첫 번째 사례를 우리는 아바도 재임시절인 2003년 다큐멘터리필름 '딥 블루(Deep Blue)'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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