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사를 써 내려가던 1970년대와 1980년대.

정치적, 이념적 논란을 제쳐 두고라도 젊기에 치열할 수 있었던 지금의 인천출신 386세대들은 중구의 용동과 신포동, 하인천 등지의 싼 선술집에 모여 미래를, 희망을 이야기했다.

당시 선술집들은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남은 집들은 7080세대들의 옛 이야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렇게 지금도 푸짐한 술과 안주 내놓고 있다.

 
■동인천 인근과 용동 - 인하의집, 큰우물집, 골목집, 고모집, 이모집, 영주집
 
인천학생회관 뒷길에 위치한 인하의집은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저녁이면 대학생들이 동인천역에서 내려 우르르 달려가는 막걸리집이다.

기름에 튀긴 삼치구이와 삶은 오징어를 초고추장을 찍어 먹으며 당시의 젊은이들은 시대의 세태를 논의하곤 했다. 지금은 삼치구이로 유명한 먹을거리 골목으로 변했으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반드시 찾아가는 젊은이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중구 용동 큰우물 바로 옆 골목에 있던 큰우물집도 청년들이 즐겨찾던 곳. 이 집의 명물 안주는 노가리구이였다. 값도 싸고 흔해서 용돈이 궁한 대학생이나 문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1970년대 시인 최병구, 손설향, 김윤식, 서예가 장인식 선생 등은 이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이름도 친근한 골목집은 동인천 옛 주택은행 옆의 언덕으로 오르는 골목길에 있었으며 되비지가 유명했던 막걸리집이다.

언덕 위쪽으로 사창가가 있어 다소 꺼림칙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주머니가 헐한 문인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으며 의자 없이 서서 막걸리를 먹던 추억이 깃든 집이다.

열차집은 동인천역에서 나와 좌측으로 청과물 가게 틈에 사람 하나 지나갈 만한 골목 안에 있었다. 집은 좁고 길어서 마치 열차 모양이었으며 바로 동인천역과 경인선 철로에 붙어 있다시피 했던 까닭에 주점 이름을 열차집으로 불렸으며 인근 상인, 리어카꾼, 지게꾼들이 드나들었다.

고모집, 이모집, 영주집. 용동 골목을 지나 언덕배기 계단을 올라가면 조그만 골목가에 나란히 문을 열고 있었다. 지난 1990년 초반까지만 해도 인천 지역에 사는 대학생들이면 누구나 한 번은 찾았던 곳.

말 그대로 고모·이모로 불리워지던 할머니들과 영주 누이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북어포와 빈대떡, 그리고 원조 감자탕을 먹으며 격동의 세대를 겪은 7080세대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신포동 - 대전집, 다복집

대전집은 빈대떡과 돼지 족발이 유명했다. 특히 빈대떡은 지금도 즉석에서 돼지기름을 번철에 두르고 부쳐 주는데 어르신들은 이제 배가 불러서 그런지 맛이 옛날만 못한 듯이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변함없는 맛에 이 집을 찾는 발걸음이 근근히 되물림되고 있지만 쇠락해가는 신포동 분위기에 맞물려 지금은 근근이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다복집은 지역에서 매우 오래된 약주집으로 두부 속을 3분의 2쯤 갈라 그 안에 돼지고기를 다져 양념에 버무린 속을 넣어 번철에 부쳐 주는 두부샌드위치와 보쌈, 스지탕, 전 등이 유명했다.

이 집은 돼지 족발을 자작으로 삶아 내는데 `카라멜'이라는 색소나 향을 바르지 않고 꼭 일반 가정에서 삶듯 해 맛이 담백해서 올드 팬들은 요즘도 이곳을 찾는다.


■하인천 북성동 - 수원집


수원집은 한국전쟁 이후 옛날 인천 부두가 인천역 뒤에 있을 때 생긴 밴댕이 횟집의 후신이다.

애초 자유공원 쪽으로 올라가서 있던 원조집은 간판 없이 `인만군'집으로 불리었는데 잡고기 회와 밴댕이회를 됫병 소주, 약주와 함께 팔았다.

술잔은 양재기였다. 밴댕이를 구워서도 팔았는데 70년대 문을 닫고 그 집에 있던 지금 사장 신태희 씨가 밑으로 내려와 차린 집이다.

수원집은 하인천역 일대 전통 명물집으로 소문이 나서 서울에서도 손님들이 내려온다.

연안부두, 구월동 밴댕이골목, 강화 등지에서 내놓는 뼈를 발라낸 `세로썰기'에 비해 옛 전통 그대로 뼈채 `가로썰기'를 하는 것이 특징으로 입안이 다소 까실거리기는 해도 씹고 나면 더 고소한 맛이 남는다.

이 집의 번창과 함께 인근에 몇 집 밴댕이회집이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용동 맥주집 - 로젠켈러, 화백, 펭고펭고
 
로젠켈러는 1960년대 말경 용동 큰우물 거리에 등장한 고급 맥주집이다.

1970년대 전성기를 누렸고 생맥주와 고급 안주와 호화로운 인테리어로 장식해 한 마디로 멋진 신사가 가는 레스토랑도 겸했으며 라이브 쇼도 하던 집이었다. 지금의 호프집과 멋진 레스토랑을 혼합해 놓은 듯한 곳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에는 대학생들의 미팅장소로도 애용됐다고 전해진다.

로젠켈러와 쌍벽을 이루던 화백 역시 큰우물 거리에 있던 넓은 실내를 가진 호화 맥주집이며 레스토랑이었다.

펭고펭고는 지금의 클럽과 같은 곳이다. 고고와 디스코가 유명했던 시절 젊음을 발산할 수 있는 장소로 각광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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