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쥐벼룩에 물린 곳이 곪아 결국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어머니의 손을 잡고 버스에서 내린 곳은 인천시 동구 송현동 배다리에 있던 백외과란 작은 병원이었다.
 
신기한 것은 당시의 기억이 선명하다는 것이다.
 
두려움에 떨며 오른 수술대며 수술 후 손에 쥔 바나나까지 말이다.
 
배다리에 대한 아련한 첫 추억은 지금도 남아있는 수술자국과 당시엔 무척 귀했을 바나나의 감미로운 맛과 함께 시작된다.
 
배다리를 다시 찾은 건 초등학교 고학년인 듯 하다.
 
동네 점방에서 얻은 할인권을 들고 오성극장, 미림극장, 인형극장, 애관극장, 문화극장 등을 누비고 다니던 때였다.

지정좌석제가 아니던 시절, 까치발을 해가며 성룡 주연의 영화 한 편을 보고 등교하는 날이면 하루종일 영화이야기를 듣느라 주변에 친구들이 떠나질 않았던 기억이 난다.

배다리에 대한 본격적인 탐방은 중학교 입학 후부터였다.
  일명 양키시장을 알며 ‘쩨’에 대한 갈망과 멋쟁이 소릴 듣기에 충분한 옷을 직접 고르곤 했다. 양키시장은 정말이지 별천지였다. 신기할 정도로 많은 외국 제품이 즐비했으니까 말이다.
 
고등학교에 들어선 단연 헌책방이 떠오른다.
 
참고서 구입한다고 돈을 받아 반 가격의 헌책을 샀던 일, 친구들 뀀에 넘어가 당시엔 가장 비싸게 팔렸던 영한사전을 들고 헌책방거리를 돌아다닌 추억이 아련하게 남는다.
 
또 순대골목에서 막걸리 한 잔 기울이며 어른 흉내 내던 일, 양키시장에서 산 빨간책을 들고 화장실로 뛰었던 일 등 돌이켜보면 배다리는 학창시절 소중한 추억을 지금도 그대로 담고 있다.

30년 추억을 담고 배다리를 다시 찾았다.
 
고서점거리며 공예상가거리, 한복거리, 그릇거리, 양키시장, 순대골목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옛 명성은 많이 잃었다. 수많은 영화관은 애관극장을 제외하곤 모두 사라졌고 30곳이 넘던 헌책방도 고작 7곳만이 남았다. 양키시장을 찾는 사람이 없어 상인들은 울상이고 그 유명한 한복거리도 예전만은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엔 아직도 사람들이 있었다.
 
일생을 바쳐 한 곳만을 지켜온 사람들 말이다.

39년 헌책방을 운영해 온 대창서림부터 40년 전통의 대성공예, 대를 이어 60년째 문을 열고 있는 용신한복상회까지 배다리 사람들은 정말 대단했다.
 
그리고 한결같이 장사는 예전만 못해도 배다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인천에서 태어난 것이, 유소년을 배다리와 함께 보낸 것이 자랑스러웠다.
 
어머니에게 물었다. 옛날 왜 하필 배다리까지 먼 거리에 있는 병원엘 다녔냐고….
 
“배다리밖에 어디 병원이 있었나.”
 
어머니의 짧은 답변이었다.

<편집자 주>


 

헌책방거리

경인전철 철길을 끼고 배다리 철교에서 동구청 방면으로 접어들면 나오는 곳이 고서점거리다.
 
1970년대 초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30~40군데의 서점이 즐비하던 곳이 이젠 7개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지난 1974년부터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아벨서점 곽현숙(57·여)씨는 그 옛날 추억에 대해 “배다리야 말로 서민 삶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곡식은 물론 각종 생필품, 철공소, 의류 등의 거래를 위해 멀리 강화에서까지 이곳을 찾았다고 회상했다.

책방은 참고서를 만드는 출판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인천지사를 형성하며 자연스럽게 형성됐고 아울러 도매 문구점까지 활성화 됐다고 한다.
 
이 거리를 기점으로 인천의 교육문화가 꽃피운 셈이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에 들며 서서히 그 명성을 잃어 갔다.
 
대형 서점이 학교 앞까지 진출하며 시장을 잠식했고 미디어의 발달로 책을 읽는 사람도 그 만큼 줄었다.

아벨서점 곽 대표는 “책방은 죽지 않는다”고 한다. 책방 주인이 죽을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초창기 이 거리에서 책방을 운영하던 많은 이가 세상을 떠났다.

떠나는 것이 어찌 책방 주인뿐인가. 그들과 함께 책방도 떠났다.

그리고 남은 7개 추억거리도 언제 떠날지 모른다.

대창서림 김주환(74)대표는 책방을 내놓기 무섭다고 한다. 인수한 이가 책방이 아닌 다른 장사를 할까 두렵다는 것이다.
 
“나이도 있고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순 없는데, 제발 우리 책방을 계속 운영해 줄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어.”
 
어쩜 책방은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의 기억에서 만큼은. 왜냐하면 그곳에 가면 언제나처럼 반겨줄 따뜻한 인정의 책방 주인들이 항상 있을 테니깐 말이다.


인터뷰-대창서림 김주환(74)대표


작은 전열기구 앞에 놓고 돋보기 넘어 소설을 읽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헌책방 주인이다.
 
불쑥 들어서며 책에 대해 묻자 “책은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길이란 것이 원래 존재치 않다가 사람들이 하나 둘 지나가며 만들어지듯 책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이 모여 결국 완성된다는 것이다.

배다리 고서점거리 초입에 있는 대창서림 김주환(74)대표의 책 예찬론이다.

어려서부터 책이 좋아 이 일을 시작한 게 어느덧 39년이 지난 김 할아버지에게 있어 책은 삶의 도구이자 수단이다.

그도 그럴것이 그 동안 헌책방을 운영하며 5남매를 키웠고 번듯한 아파트도 장만했으니 말이다.

“예전엔 좋았지. 헌책 쌓아놓을 공간이 없을 정도였으니깐. 지금은 예전같지 않아.”

한때 이곳엔 30여 곳이 넘는 헌책방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새 책만을 취급하는 한 곳까지 7개 서점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도 단골들은 꾸준히 찾아. 헌책만이 가지고 있는 묘한 매력이 있거든.”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은 매력일 수 없다. 책을 어찌 물질적 가치로만 따질 것인가.

김 할아버지가 전하는 헌책의 매력은 옛것에 대한 추억이다.

오래전 출판돼 새 책방에선 찾기 어려운 서적을 발견하는 희열감이다.
 
그래서 일까 김 할아버지는 춘원 이광수의 ‘무정’을 가장 감명 깊은 소설로 꼽았다.
 
세로쓰기로 읽기도 힘들고 출판된 지 50년이 넘어 색도 바랜 말그대로 헌책을 꺼내보이며 '보물 1호'라고 자랑한다.

“책은 잘 익은 김치와 같아. 정성으로 담궈 긴 시간 숙성시켜야 하지. 그리고 반드시 내 손을 떠나면 안돼.”
 
인터넷을 이용해 쉽게 활자 매체와 접하는 현 세태가 아쉽다.
 
수능을 마친 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좀 소개시켜달라고 하자 김 할아버지는 “두 말할 거 없이 조정래의 ‘태백산맥’이지”라고 한다.


공예품 거리

고서점 및 한복, 그릇, 양키시장으로 대변되는 배다리에 최근 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
 지하상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예품거리다.
 아직 완벽한 모습의 거리를 갖추진 못 했지만 한지를 이용한 전통공예품부터 현대공예, 민화공예 등 다양한 형태의 공방이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있다.
 배다리 특색 거리에 도전장을 내고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태공방-

이곳에 자리잡은 공예상가 중 가장 오래됐다.

한지를 이용해 작게는 접시부터 크게는 수납장까지 만드는 전통 한지공예방이다.

대표 임순희(47·여)씨는 "전통 한지공예는 실생활에 그대로 사용할 수 있고 소재도 부드럽고 가벼워 일반 주부들도 많이 배운다"고 말했다.

실제 매주 수·목요일을 이용해 일반인을 위한 강좌를 열고 있었는데 1년 정도 배우면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그릇이며 작은 수납장 등은 혼자서도 거뜬히 만들수 있다.

수강료는 월 10만 원.

완성된 제품은 판매도 가능한데 임 대표가 약 6개월에 걸쳐 만든 수납장의 경우 300만 원을 호가한다.

접시 및 수저 받침대는 5천~1만 원선.

낙화민화

한지 및 통가죽, 대나무 등을 이용해 만든 완성된 공예품에 인두를 사용해 문양을 새겨 넣는 곳이다.

오방색(백·청·적·황·묵)을 기본으로 병풍을 비롯한 전통 생활공예품, 족자 등 못 만드는 제품이 없다.

7년전부터 이곳에서 공예방을 운영한 정성훈(40)대표는 "재능만 있으면 6개월 정도 수강하면 초보자도 쉽게 공예품을 만들수 있다"고 말했다.
  개인지도는 월 10만 원.

얇은 한지에 인두의 열로 문양을 새긴 전주합죽선같이 난이도가 높은 작품은 2년 이상을 꾸준히 배워야 한다.

참빗이 1만 원에 판매되고 있으며 전주합죽선의 경우 15만 원 가량 한다.

비단공방

비단을 이용한 각종 악세사리를 만드는 곳이다.

한지에 멋스런 그림을 넣어 만든 작은 놀이개며 열쇠고리 등이 이채롭다.

이런 작품을 흔히 데코파쥬쉐도운박스라고 하는데 서양의 그것과 비교하면 전통 문양의 한지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공예촌

전통 한지공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개발한 곳이다.

한지를 이용해 찻장 및 보석함, 실내등을 만들 수 있다.

전통공예와 비교해 배우기 쉽고 실생활에 그대로 응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곳에서 8년째 공예품을 만들고 있는 이미자(40)대표는 "일반 가정집보다는 고풍스런 멋을 중요시하는 인테리어 소품 및 외국인 선물용으로 많이 찾는다"고 했다.

수강료 월 5만~10만 원을 내고 6개월 가량 배우면 간단한 실내등은 손수 만들 수 있다.

또 실력이 붙으면 일상에서 쓰이는 거의 모든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조명등이 5만 원부터 판매되고 있으며 최고가는 200만 원을 넘는 고급 작품도 있다.

초가

도자기 공예품 전시장이다.

크고 작은 찻잔을 비롯해 다기 세트가 오목조목 전시돼 있다.

직접 다기를 만드는 체험장을 갖춰 놓진 못 했다.


양키시장

송현자유시장. 일명 양키시장으로 통하는 이곳은 중앙시장 한복거리 끝자락과 맞물려 있다.

경인전철 동인천역 뒤쪽 지하상가를 통해 내려오면 바로 만날 수 있는데 인천에서 살아온 30대 이상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기웃거렸을 추억의 거리다.

양키시장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0년대부터 미국산 물품을 팔며 형성됐는데 이곳에 가면 부평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과 통조림, 담배 등의 미제 물건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다 경찰이 단속이라도 나오면 순식간에 미제 물건들이 사라져 이른바 `도깨비 시장’으로도 통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이곳에서 값싼 군복을 구입해 검정색으로 물들여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을 정도로 번성해 100여 개가 넘는 노점이 성업 중이었다. 현재는 손님이 크게 줄어 80여 개의 상점만이 장사를 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수입자유화 조치 이후 미국산 물품이 흔해지자 양키시장의 위상이 크게 흔들린 것이다.
 
여기에 대형 유통매장이 하나 둘 들어서며 상대적으로 주차 및 쇼핑이 불편한 이곳을 찾는 손님 수가 현저히 줄었다.

또 양키시장을 대변하던 오성극장, 미림극장 등이 경영 악화로 문을 닫으며 악순환이 계속됐다.

30년간 장사를 해온 일호사의 정진수(75) 할머니는 “서울올림픽 당시에는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외국인들이 청바지 등 의류를 싹쓸이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며 “요즘엔 하루 10만 원 매출을 올리기도 벅차다”고 말했다.
 
양키시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의류매장이 이 같은 상황이다.
 
당연히 상당수 가게들이 미국산 제품이 아닌 값싼 국산의류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최근엔 젊은 층을 겨냥한 항공점퍼 및 물 빠진 청바지, 가죽옷 및 벨트, 신발 등의 매장으로 전환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수입잡화를 판매하는 곳도 10여 군데 남아있다.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외국산 초코릿을 비롯해 화장품, 커피 등을 판매한다.

이미 동네 슈퍼에서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는 제품이지만 이곳을 찾는 단골은 꼭 하나씩 구매한다.

잡화매장 허순영(68·여)씨는 “이 일로 아들 셋 대학 보내고 키웠으면 됐지”라며 이젠 소일거리 삶아 친구들과 수다떠는 재미로 가게를 연다고 한다.

취재가 있던 그날도 수십년간 함께 잡화를 팔아온 아주머니 네 분이 모여 앉아 김치찌개에 맛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들이 정작 팔려고 하는 것은 미제 물건이 아니라 추억인 듯 싶었다.


한복거리

경인전철 동인천역 뒤편을 지나 지하통로를 빠져 나오면 전통 한복거리를 만나게 된다. 일명 `배다리 중앙시장 한복거리'다.
 
인천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한복을 지으러 이곳을 찾았을 만큼 유명한 곳이다.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인천은 물론 부천, 안산, 멀리 충청도까지도 이곳에서 한복을 짓기 위해 줄이었던 곳이다.
 
현재도 50여 곳의 한복집이 성업 중인데 서울의 동대문과 비교해 가격 및 디자인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업소가 즐비하다.

이곳에 한복집이 형성된 건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등지에서 피난 온 실향민 중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아낙네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옷가지를 만들어 내다 팔면서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한복집 주인 일부는 실향민으로 구성돼 있다.

그중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대지상회 김선애(75) 할머니는 “가마니를 펴 놓고 옷가지를 팔던 것이 한복집으로 발전해 벌써 50년이 지났다”며 “70년대엔 장사가 잘 돼 돈을 벌어 다른 곳으로 떠난 사람도 많다”고 했다.
 
또 예전엔 한복을 사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뤄 새벽 4시부터 장사를 시작했다고 과거를 떠올렸다.
 
지금은 백화점과 대형 매장에 밀려 장사가 신통치 않다.
 
그래도 이곳에 가면 혼수품으로 쓰이는 전통 한복 및 침구류를 시중보다 30% 가량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여성 한복의 경우 물빨래가 가능한 재질이 15만 원선이고 본견(실크)는 30만 원선이다.
 
한복과 함께 인근 그릇거리를 비롯해 침구, 홈패션 등의 상점들도 밀집돼 있어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의 필수 데이트 코스이기도 하다.
 
특히 중앙시장 바깥쪽 그러니까 옛 미림극장을 지나 송림동 삼거리로 향하는 길가에는 그릇상점들이 밀집해 있다.
 
혼수용 홈세트부터 식당용 식기 등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많은 그릇들이 쌓여 있다.
 
그릇과 함께 밥상이나 목기 등도 이 거리에 즐비하다.
 
백화점에서 눈도장을 찍고 이곳에 와서 구입하면 말 그대로 알뜰파가 될 수 있다.

밥상 및 목기 전문 상가인 대성공예 박해균(41)씨는 “이곳 그릇도매상가들은 공장도 가격에서 세일이 들어가기 때문에 백화점이 아무리 할인판매를 하더라도 가격 경쟁력만큼은 자신있다”고 말했다.


인터뷰 -한복거리 용신상회 이교자(56)씨

“60년 대를 이어 한복을 짓고 있죠.”
 
어머니 최단춘(83)씨의 뒤를 이어 반세기를 훨씬 넘긴 지난 60년간 한복집을 운영하고 있는 용신상회 이교자(56·여)씨는 배다리 한복거리의 안방마님이다.

원단을 고르고 기본 디자인을 정한 후 손님의 취향에 맞춘 한복을 만들기 위해 꼼꼼히 바느질을 한 세월이 이 씨만 어느덧 30년이다.
 
“그 동안 참 많은 사람의 옷을 지었죠. 그러나 단 한 벌도 같은 색상의 디자인은 없었던 거 같아요.”
 
사람의 생김새가 제 각각이 듯 그들이 입는 옷 또한 차별화돼야 한다는 게 이 씨의 생각이다.
 
그런 이 씨가 요즘 고민이 적지 않다.

가업을 이어 한복집을 운영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딸이 한 명 있지만 현재 외국에서 공부 중이란다.
 
“꼭 식구가 아니더라도 한복 짓는 기술을 가르쳐 주고 싶어요. 그래서 어머니와 제가 이룬 작은 희망을 계속 이어갔으면 하죠.”

우리옷을 통해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거창한 목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사라져가는 한복 문화의 맥은 이어주고 싶다는 것이다.

“원래 중앙시장은 꽤 큰 시장이었습니다. 전국에서 한복을 구입하려 몰렸으니깐요.”
 
그때만 하더라도 이 일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고 한다.
 
최근에 기성품인 개량한복에 밀리고 일부 대형 매장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면서 매출이 떨어지는 것도 한복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는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이 씨는 “TV를 통해 보면 국제회의 등을 할 때 각국 정상들이 개최국의 전통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모습을 보며 부러울 때가 많다”며 “우리 한복만 갈수록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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