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을 해석함에 있어 문헌이든 유물이든 자료에 근거하지 않고 추론이나 심증으로 내리는 결론은 모두가 경계해야 하는 사안이다. 특히 어떤 결론을 내리기 위해 각본을 설정하고 그에 꿰맞추려 하는 행위는 내용의 경중과 관계없이 어떠한 경우라도 용납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전근대에 있어 역사의 기록은 소수 귀족 엘리트들에 의해 대행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과거속으로 좀 더 멀리 가면 갈수록 교육의 기회나 그에 따른 관료로의 진출 또는 부의 축적에 이르기까지 그들 이외의 집단에서는 신분상승을 기대할 수가 없었고 그러한 현상은 전근대의 전시기를 통틀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에 의한 일반 민에 대한 기록은 때때로 구태의연한 ‘민본정캄의 포장일 뿐 기록으로 남긴 사례로서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실체를 밝혀주기에도 미흡하기 이를 데 없다. 자연 이들에 대한 역사적 해석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니 역사속의 기록이 강자의 권리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역사극으로 고구려에 관한 드라마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소서노, 을지문덕, 양만춘, 연개소문, 대조영 등 무수히 많은 고구려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 설킨 인간군상(群像)을 보여주는데 그때마다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 역사가 다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살수대첩의 을지문덕, 안시성 전투의 양만춘 등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해 고구려의 대명사라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런데 그들의 전과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이후 정·관계에서의 역할과 비중은 상당한 지위를 확보했을 것으로 판단되나 어찌된 일인지 「삼국사기」에서는 이들에 관한 기록을 더 이상 찾아 볼 수가 없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가? 삼국시대 역사는 고려왕조 초기 「삼국사」로 재평가되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가 이러한 영웅적 사실을 누락했을 이유는 만무하다. 그러나 고려 중기 북진정책의 좌절과 함께 김부식에 의해 신라의 역사성을 계승하는 「삼국사기」가 편찬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고구려의 상징적 영웅이었던 두 인물을 고구려의 기록에서 소략화함으로써 국가 시책의 포기에 따르는 정권의 딜레마를 극복하려 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 기록은 시대상황을 대변하지 못할 수도 있고, 정치적 변화에 따라 첨삭도 가해 질 수 있는 역사왜곡의 소지가 함축되어 있다. 더구나 자료에 근거한 결론을 최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 자료에 대한 평가없이 무조건 맹신하다 보면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는 커녕 오히려 혼란을 유발케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역사는 긴 세월동안 기록에 대한 의구심과 진실 여부에 대한 검증을 통해 마련된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대소사는 모두 기록화 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복잡다단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는 것이기에 그 유형을 하나의 정형화된 도식으로 처리하기에는 너무나 무모한 짓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주변적 역학관계에 따라 생성될 수도, 영원히 사장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진실을 규명해 가는 작업에 있어서도 오늘날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 인간사의 문제들에 더 애착이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설을 세운다는 것은 창조적 행위이지만 과학이나 인간사에 있어 미지의 존재에 대한 개념을 미리 정립해 본다는 자체가 주변 정황에 대한 정밀한 상황판단, 내용의 숙지 등을 기본 토양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임에는 틀림없다. TV의 사극을 역사책으로 믿는 사람은 없겠지만, 극의 치밀한 구성도 여하에 따라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장안에는 소서노가 화제가 되고 있다. 주몽의 부인으로 고구려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그의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의 백제 건국에도 심혈을 쏟았던 여걸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안타깝게도 기록으로 남은 몇 줄의 사료를 통해 행간의 의미를 찾아보고 당시의 정황을 추론하는 것은 이제 문헌사학의 범주를 벗어난 것 같다.

백제의 수도였던 인천에서 소서노와 비류, 비류의 추종자들이 왕도 미추홀을 건국해가는 웅대하고 장엄한 대서사시가 만들어지고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인천인의 인천사랑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사건으로 기록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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