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수모와 능멸을 참아내며 세상을 바꿀 꿈을 꾸던 흥선대원군 이하응. 그가 마련한 비장의 한 수는 아버지 남연군묘의 이장이었다.

이하응은 `2대에 걸쳐 군왕이 날 자리'라는 지관의 말을 믿고 연천에 있던 남연군묘를 충남 예산으로 옮겼다. 이장한 지 7년 뒤 아들 명복은 왕위에 올랐다.

손자 순종도 황위에 올랐으니 2대군왕지지(二代君王之地)라는 지관의 말에 틀림은 없었다.

광무2년(1898년) 2월 흥선대원군은 고양군 공덕리(현 서울 마포구 공덕4동)의 운현궁 별장 `아소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생전 아버지 묘를 쓰는 일에 운명을 걸었던 노정객은 그대로 `아소당' 뒤뜰에 묻혔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흐른 뒤에야 조정은 흥선대원군의 묘인 흥원을 아소당 뒤뜰에서 파주 운천면 대덕동(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으로 옮겼다. 첫 번째 천봉(遷奉 : 왕실의 묘를 이장하는 일)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이 5번째 소장유물자료집으로 발간한 `흥원천봉등록(興園遷奉謄錄)'은 흥원을 파주로 천봉할 당시의 기록을 옮겨 적은 책이다.

흥원을 천봉하는 과정과 거기에 들어간 물력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어 당시 국가차원에서 시행한 천봉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으며 융희(순종 제위 당시) 연간에 사용된 관문서와 당시의 용어를 살필 수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자료집 앞쪽에는 국왕에게 상주해 결재를 마친 문서인 주본을 비롯해 보고, 조회, 통첩, 청구서 등의 문서를 한글로 옮겼다. 뒤쪽에는 원서의 영인본을 함께 실어 원문과 비교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흥원의 천봉은 융희 원년(1907년) 11월 10일에 시작돼 융희 2년(1908년) 2월 1일에 마무리됐다. 천봉 책임자로는 제실회계심사국장 김각현이 임명됐다.

김각현은 산지관(지리학을 전공한 관상감 관원) 신택두·최홍준과 함께 파주 일대로 나가 묘자리를 살핀 뒤 장릉(조선 16대 인조와 인열왕후의 능)을 천봉한 자리를 점지해 상주한다.

“용세(龍勢)는 경행(慶幸)하고 존귀한 기상이 많고 혈국(穴局 : 묘자리와 그 주위의 형국을 이름)은 지극히 정수하고 안온합니다. 또 골육수(무덤이 있는 산 밑에서 흐르는 강물)는 수백 리를 흘러 정면으로 들어와서 명당을 지나가니, 천만년토록복록을 누리실 자리입니다.” 천봉에 소요된 비용은 구원(舊園)을 헐고 벽실을 봉출한 비용 68환31전 등 총 3만2천51환41전6리로 기록돼 있다.

등록의 마지막 부분에는 헌의대원왕원지(獻懿大院王園誌)와 순목대원비원지(純穆大院妃園誌), 신도비명(神道碑銘), 상량문(上樑文)이 기재돼 있다. 헌의대원왕원지에는 황제(순종)의 할아버지인 대원군에 대한 인식이 담겨있다.

“태황제(고종)가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왕은 황제의 본생부로서 주공이 어린 성왕을 보필했던 일을 떠맡았다. 구족을 돈목하게 하고 사색의 당파를 평등하게 기용하였으며, 요행의 문로를 막고 언론의 통로를 열며 침체된 사람들을 발탁하고 세도가들을 물리쳤다.” 죽은 사람 욕해봐야 소용없다고 생전 끊임없이 흥선대원군을 견제했던 친일 내각이 그를 높이 평가한 점이 흥미롭다.

1966년 흥원은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또 한 번 자리를 옮긴다. 흥원 일대에 미군 군사시시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척화비까지 세우며 외세를 배척했던 그가 사후에도 외세에 밀려 쉴 곳을 옮겨야 했다는 점이 얄궂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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