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청동기시대(Bronze age 기원전 1.000~300년)(1)]의 본문에서 어느 나라나 그 나라 역사의 위대함에 대한 이해가 없을 경우 미래도 없다는 이론을 서술했다. 즉, 누구나 자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청동기시대에 금속제 농기구가 사용되면서 사회적으로 최초의 부족(tribe)이 탄생되고, 금속제 농기구 사용에 의한 경작지 개척으로 사유재가 인정되면서 남여결합은 일부일처제로 형성, 남자 중심의 가부장제가 실시돼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가족-씨족-작은마을-촌락으로부터 상거래 중심지 소도시(Town)가 생기고, 중심상거래 도시인 대도시(city)가 탄생되면서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초기에 도시국가(city-state)가 탄생됐다.

중국 동북지역의 중심지인 길림의 서단산 문화는 예맥족이라는 중국학자들의 제시는 우리 민족의 기원을 예맥족-부여족-고구려·백제·신라 등으로 발전돼 왔다. 서단산 문화의 시작은 성성초무덤의 시작연대는 B.C 1.105±100년이며, 끝나는 시기는 후석산(候石山) 무덤으로 기원전 405년이다. 예맥은 중국 동북지구와 한반도 고예족(古濊族)과 맥족(貊族)계통의 총칭이다. 예맥족은 예족과 맥족이 혼합된 종족으로 동일언어, 습속의 민족이다.

서단산 문화의 대표적 문화는 돌무덤(石棺墓)이다. 또한 서단산유적출토의 농구는 돌도끼, 돌칼, 돌자귀이며, 곡식은 기장, 금색강아지풀, 짐승은 돼지, 금속도구는 청동제 도끼, 칼 등 그리고 다량의 조, 콩외에 양, 개와 소량의 말(馬) 등이 있었다. 이러한 석관묘는 한반도 모든 지역에서 확인된 지석묘(dolmen)와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중국 동북 요녕성 남상근(男上根)유적의 석관묘출토 청동검(기원전 9세기)은 한국 부여 송국리(松菊里)유적의 석관묘에서 출토된 청동검(기원전 7세기)과 완전히 일치하다.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예맥족은 우리의 직접 조상으로 이 땅의 신석기시대의 전통을 이어 받아 찬란한 청동기 문화 창조, 기원전 5세기경 최초 국가 체제 부여국(夫餘國)을 탄생시켰다.

한반도 청동기시대에 축조된 고인돌은 남북한을 합해 4만여 기가 된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초기부터 철기시대 종료시기(기원전후한 시기)까지 축조됐으며, 이러한 고인돌문화는 일본의 구주까지 전파됐다.

나자는 한반도 고인돌과 선돌(Menhil)은 예맥족(한민족)의 혼(Soul)의 표상(Symbol)이며, 동북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우리 조상이 제작한 거석문화라고 생각한다.

한반도 고인돌은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분류되고 있다. 첫째, 책상형의 북방식이고 둘째 머리돌만한 작은 받침돌 6~8개 위에 상석(slab)을 올려 놓은 변형 또는 남방식 지석묘이며, 셋째 상석만을 지표(地上)에 올려 놓은 무지석 지석묘(전형적 남방식 지석묘) 등이다. 예로 연천지역에 책상형(북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최근(2008년 9월)에 백학저수지 부근에서 무지석 지석묘 1기를 발견해 2007년 봄 발견한 무지석지석묘 1기와 더불어 2기를 찿았다.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기본적으로 화살촉, 석검과 청동검 등이다.

고인돌은 죽은 자를 숭배하는 무덤(La culte des morts)이다. 고인돌 축조 시 상석(上石 slab)은 죽은 자의 집을 덮는 지붕(toit)으로 표현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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