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예술 브랜드 『국악』이 명품인 까닭은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독특한 음조직으로 창조한 예술이라고 했다. 그 예술의 세계는 크게 두 가닥의 소리 세상을 펼치는데, 하나는 ‘솔’ 음 종지의 평조 선법과 다른 하나는 ‘라’ 음 종지의 계면조 선법에 의함도 전술한 바 있다.

일본풍의 노래가 교과서에 실려서는 안 됨을 역설하다 보니 일본 노래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특히 일본 노래의 음계를 알고 싶은 호기심이 그렇다.
‘일본 노래의 음계는 어떨까?’
솔직히 말해 나는 일본 노래의 음계나 선법에 관한한 문외한이다. 그렇기에 내가 일본 노래의 이론을 말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 일본 음악에 대한 일천한 지식이 그렇고, 듣지도,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노래의 선법을 감히 알아보고 싶은 욕구가 있음은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일정 치하를 사셨던-생존하고 계신-부모님 때문에 나는 어려서부터 일본 노래 몇 곡을 귀에 달고 살았다. 지금도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노래 중에 ‘황성의 월(荒城の月)’이 있다.

나의 아버님은 1920년에 태어나셨다. 그러니 한일합방의 경술국치(1910년) 이후의 일제 치하에서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내셨다. 나라 잃은 설움과 함께 하신 그 시절, 아버님이 아닌 나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고 아찔하다. 무섭고 떨린다.

8·15 해방이 되기까지 무려 25년간을 왜정 치하에서 사셨던 아버님은 아홉 살에 보통학교에 입학하셨다. 아예 국어는 배울 기회조차 없었고 일본어 공부에, 일본 노래에, 온통 일본제국주의식 교육뿐이었다고 하셨다. 일본 선생들은 제국주의 복장에 일본 군도를 차고 수업을 했다고 한다. “으메나, 무서워라.”
아버님은 ‘봉선화’, ‘황성옛터’ 등의 민족 감정이 서린 노래도 자주 부르셨고 그럴 때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셨다. 그 아픔을 회상하시려는 듯 일본인들의 노래였던 ‘황성의 월’도 자주 부르셨는데 노래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 배경을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이다. 배경은 이랬다.

1932년.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는 단성사 극장에서 이 노래를 발표하게 된다. 이 노래는 나라 잃은 설움을 자극하는 불씨가 돼 조선인 관람객들은 울음바다에 빠지게 되고, 입소문을 타고 요원의 불길처럼 조선인들의 입가를 오르내린다. 마침내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조선인들에게 ‘국민가요’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혼비백산할 정도로 놀란 조선총독부는 가창 정지는 물론 노래의 확산 방지에 골몰하지만 결국 조선인들의 마음의 강물까지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문화 정책으로 대응하게 되는데 일본인 식자층이라 할 수 있는 문화계층에서 ‘황성옛터’에 필적할 만한 노래를 찾게 되고, 이 노래가 바로 ‘황성의 월’이었다고….
아버님(89세)은 ‘황성의 월’을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계신다. 아버님보다 한 살 연상이신 어머님도 마찬가지여서 이 노래의 일본어 가사와 음정을 나는 지금까지 어렴풋하게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다. 지피지기자(知彼知己者)가 백전백승(百戰百勝)하는 법. 과거를 잊으면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갈파한 바이런의 교훈을 되새기는 심정에서 아버님의 도움을 받아 이 노래를 재현해 보겠다.

   ‘황성(荒城)의 월(月)’
    (고우죠우노우쓰끼)
    {こぅじよぅのつき}
“하루고-로-노- /하나노-엔--”
{はるこうろうの/はなの-えん}
“메구르 사가쓰끼-/가게사시데-”
{めぐゐ さかつき-/かげさしで-}
“지요노 마쓰가에-/와께이데시-”
{ぢよのまっがえ- /わけいてし-}
“무가시노 히까리-/이마이스고-”  
{むかしの ひかり-/いまいづこ-}
그러나 이 노래는 가수 이애리수의 ‘황성옛터’를 초월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생존 소식이 엊그제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놀랍고 반갑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