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대한민국의 최고의 교통망과 녹지율을 자랑하는 맑고 푸른 자연과 미래형 생활환경이 공존하는 명품도시, 수도권 최고의 청정 도시로 주목받고 있는 도시인 하남시.
하남시는 삼국시대 초 백제 시조 온조왕 13년에 현재의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 도읍을 정하고 ‘하남위례성’이라 불려 왔으며, 백제 근초고왕 25년까지 백제의 도읍지였고, 고려 태조 23년에 한주를 광주라 고쳐 불러 이때부터 광주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이어 조선 선조 10년에 광주군 동부면이 됐으며, 1980년 12월 1일 동부읍으로 승격했고, 1989년 1월 1일 광주군 동부읍. 서부면과 중부면 일부가 합쳐져 하남시로 승격돼 오늘의 하남시가 됐다.

또한 하남은 1987년 중부고속국도와 서울외곽순환고속국도가 개통되고 1991년 신장동과 창우동 일원 택지개발을 착수해 1994년 12월 아파트 단지에 첫 입주를 시작한 데 이어 신장동 2지구 택지개발사업이 2002년 11월 완료돼 수도권의 쾌적한 주거단지로 자리 잡게 됐다.  아울러 풍산택지개발지구 내 5천760여 가구가 입주 완료됐으며, 올해 착공하는 위례신도시 하남지구가 제 모습을 갖추게 되면 명품신도시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될 전망으로 수도권에서 제일가는 역사와 자연이 살아 숨쉬는 청정 휴식공간을 갖추고 있는 명품도시 하남이다.

하남시는 말 그대로 산 좋고 물 좋고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하남시의 명물과 문화유적을 찾아본다.

▶검단산(黔丹山)=검단산은 높이 657m로 하남시의 대표적인 명산이며, 수도권에 위치한 편리함으로 인해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한성백제 500년의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을 지키는 영산이기도 했던 검단산의 ‘검’은 거룩하고 신성한 숭배의 대상을 일컫던 말로 ‘검단’이란 성스러운 제단을 의미한다.

곳곳에 백제 초중기의 왕들이 국가의 번영과 태평을 빌던 제단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현재에도 매년 산악인들이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정상 부근은 넓은 공터로 사방이 확 트여 있고 특히 그 위에 펼쳐진 갈대숲의 장관은 가히 일품이다.

   
 
▶팔당댐=수자원이 풍부한 하남은 언제나 맑고 깨끗한 물을 하루 7만t씩 수도권 주민들에게 공급하고 있다.

하남시 배알미동에 소재한 한국수자원공사 팔당권관리단의 제 1, 2, 3 취수장에서 취수하고 있는 상수도 용수는 상수원보호구역에서 취수한 것으로 하남시민은 물론 수도권 주민의 70%에 언제나 맑고 깨끗한 청정지역의 수자원이 공급되고 있다.

▶미사리 경정장=경정장은 2천500명이 실내외 좌석에 앉아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지상 3층 규모의 관람 및 운영동과 경기공간인 호수, 주변 공원시설 등으로 만들어져 있다. 2002년 6월 첫 개장한 경정장은 승부를 예측하기 어려운 스릴 넘치는 게임으로 물 위에서 펼쳐지는 박진감 넘치는 모터보트 레이싱 경정은 1경주에 6명의 선수들이 출전해 순위를 겨루는 참여형 마린스포츠로 경정선수들은 흰색, 검정색, 빨강, 파랑, 노랑, 녹색의 번호별로 정해진 색상의 유니폼을 입고 한 바퀴 600m의 경주코스를 세 바퀴 돌아 순위를 결정지으며, 경주는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에 낮 12시부터 15경기가 열린다.

▶미사리 조정경기장=미사리 조정경기장은 88서울올림픽 기간 중 조정과 카누경기가 열렸던 국제 규모의 경기장이다. 132만2천320㎡(40만 평)의 넒은 공간에 호수 주위를 따라 잘 단장된 자전거 하이킹코스와 자연녹지 공간에 축구, 배구, 베드민턴, 조깅을 위한 생활체육시설이 조성돼 있어 가족 나들이와 각종 모임, 소풍 및 야외결혼식 장소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위치 또한 올림픽대로와 중부고속국도, 팔당대교와도 인접해 있어 수도권 도시민의 좋은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미사리 카페촌=수도권 제일로 알려질 만큼 유명한 곳이 미사리 카페촌이다. 미사리 경정장과 조정경기장 정면으로는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카페의 거리가 형성돼 있다. 70~80년대 인기 있었던 통기타 가수들의 라이브 공연을 하는 카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라이브 카페촌의 원조라 불린다.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 시원한 강바람과 교외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으며, 통기타와 라이브의 낭만을 느낄 수 있다.

▶광주향교(문화재 자료 제13호)=현재 교산동에 위치하고 있는 광주향교는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 숙종 29년(1703년)에 이성산성 아래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서당에서 공부한 15세 이상의 양반자제를 교육하던 시설로서 경내에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를 비롯한 6동의 건물이 있으며, 대성정에는 공자와 4성(聖), 동무와 서무에는 송나라 2현(賢), 우리나라 18현(賢)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광주향교는 지금의 수원, 화성, 의왕, 성남, 광주, 강동, 강남, 송파까지 관장하던 전국에서 제일 큰 향교였다고 한다.

▶이성산성(사적 제422호)=이성산성은 하남시 춘궁동 산 36번지의 이성산(표고 209.8m)에 위치하고 있

   
 
다. 성벽의 높이는 6~7m, 둘레는 1.84㎞ 규모이며, 주봉을 중심으로 해 자연지형에 따라 축조했기 때문에 부정형의 오각형에 가깝다. 성곽과 당시 사용돼 온 저수지 및 건물터가 남아 있으며, 정상에는 왕이 제를 지내던 9각과 8각의 건물지가 있다. 특히 6각 건물지는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발견된 예가 없다. 건물지와 성벽에서 출토되는 토기, 기와, 무기류 이외에도 저수지 발굴을 통해 다양한 생활도구가 촐토돼 당시 사화상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미사리 선사유적지(사적 제269호)=미사리 선사유적지는 남북 1천470m, 동서 20~40m의 규모로 1962년 발견됐다. 이 유적지에서는 신석기시대, 무문토기시대, 원삼국시대, 백제시대 등 여러 시대에 걸친 문화유적이 층위를 이룬 채 발견돼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유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청동기 시대의 다량의 무문토기와 함께 당시의 집터가 확인됐고 신석기시대 층에서도 다량의 빗살무늬토기, 어망추, 석촉, 석부 등의 생활도구와 탄화도토리가 채집됐으며, 국내 최초로 백제시대의 밭이 대규모로 발굴돼 우리나라의 농경기술 발달사 및 관련분야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태평2년 명마애약사불좌상(보물 제981호)=명마애약사불좌상은 하남시 객산길 39번지에 위치에 있으며, 높이가 93㎝로 큰 편은 아니지만 삼각형 바위에 조각된 마애불로서 조각술이 정교하고 불신의 비례도 휼륭하다.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어 불상의 이름이 약사불임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의 왼쪽에는 ‘태평이년 정축 칠월이십구일 고석불재여사을중수위금상황제만세원(太平二年丁丑七月二十九日 古石佛在如賜乙重修爲今上皇帝萬歲願)이라는 명문이 음각돼 있으며, 이것이 ‘태평 2년(977) 정축 7월 29일에 옛 석불이 있던 것을 중수하오니 지금 황제의 만세를 기원합니다’라는 뜻이다. 그 옆에는 조그마한 폭포(객산폭포)와 약수터가 자리하고 있다.

   
 

▶춘궁리 3층 석탑(보물 제13호)=3층 석탑은 춘궁동 466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높이 3.6m이며 2층의 기단과 3층의 탑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석탑은 각 층의 몸돌이 지나치게 큰 데 비해 2층과 3층은 현저히 줄어들고 지붕돌도 이에 비례해 줄어들었다. 이러한 급격한 체감 비율은 다른 탑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러나 매우 안정감이 있고 세련된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그대로 이은 정사각형의 석탑으로 조성연대가 고려 중기 이하로 내려가지는 않는다고 한다. 1966년 보수 공사 때 탑 안에서 납석제 소탑들이 출토된 바 있다.

▶춘궁리 5층 석탑(보물 제12호)=춘궁리 3층 석탑 서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높이가 7.5m이고 2층의 기단과 5층의 탑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석탑도 몸돌 비율이 상층에 이를수록 급격히 줄어 들고 있으며 1층의 몸돌이 2단으로 이루어진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인 느낌은 날렵하고, 경쾌하여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사충서원 및 묘정비(향토유적 제3호)=사충서원 및 묘정비는 동수막길 37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임사화사 때 희생된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4대신을 제향하기 위해 1725년(영조 1년) 과천 노량진(지금의 노량진역)에 설립된 서원이다. 이들은 영조를 옹립하려다 소론의 무고로 모두 사사됐던 사람들인데 영조는 즉위하자 이들을 배향하기 위해 사충서원을 건립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4대신을 죄인으로 만들고 서원도 철폐했다 한다. 그 후 1740년 4대신이 다시 충신으로 판정됐으나 서원은 곧바로 복설되지 못하다가 1756년에야 복설되면서 사충서원이라 부르게 됐다. 사충서원은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 봄 사충서원 자리가 철도용지로 편입되게 돼 당시 고양군 한지면 보광동(현재 용산구 보광동)으로 이건했지만 6·25전쟁 때 파괴되고 1968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 중건했다.

▶상사창동 연자방아(문화재자료 잜 제82호)=연자방아는 상사창동 346-2번지 위치에 193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연자매’, ‘돌매방아’라고도 한다. 방아틀에 연결된 돌을 말과 소가 끌어 돌림으로써 곡물 껍떼기를 벗기거나 밀을 빻았던 것으로 농촌에서 널리 사용되던 농기구를 말한다.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어 아래위가 잘 맞닿도록 해 뱅뱅 돌릴 수 있게 만들어졌다.

연자매는 곡물을 찧고 빻는 일 외에 연자매를 둘러싼 연자매계의 계원끼리 서로 돕는 강력한 협동의 기능도 했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설치해 사용해 왔으나 현재는 경기도 문화재 자료로 보존관리하고 있다. 
▶구산성지(향토유적 제4호)=구산성지는 망월동 387-12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다해 구(龜)자와 뫼산자를 써서 ‘구산’이라고 불리는 곳에 103위 성인 중 한 명인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여덟 명의 순교자가 묻힌 성지를 말한다.

구산성지와 구산성당은 조경이 뛰어나 드라마, CF, 영화촬영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할 만큼 아늑한 분위기에서 고난과 영광의 발자취를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많은 가톨릭 신자와 관광객이 자주 찾는다. 특히 구산마을은 그들의 후손들이 대대로 순교자 묘소를 원형대로 보존하고 200여 년 동안 교회를 지키며 신앙생활을 지켜오고 있다.

이 외에도 하남시 관내 곳곳에는 2천 년 역사의 숨결의 자취인 많은 유적이 산재돼 있을 뿐더러 한강변 미사리 조정경기장 일대 수천만㎡의 하천변에 위치한 한강생태공원은 인위적인 것을 최대한 배제하고 자연 그대로의 생태계를 간직하고 있어 시민들의 산책코스로 유명함은 물론 다양한 편의시설을 통해 시민들에게 풍요로운 여가생활을 제공하고 있어 각광을 받고 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