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태 (사)인천사연구소 이사장/인하대 강사

 吾等(오등)은 慈(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 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이하 생략

위 글은 기미독립선언문의 일부다. 올해는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90년이 되는 의미가 깊은 해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건국 60주년’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에 대한 논란의 진위와 의도를 논하고자 하는 주제는 아니므로 일단은 이에 대한 의견은 배제하고 생각을 해보고자 한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낭독됐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독립만세운동은 퍼져나갔다. 또한 세계만방에 이 같은 우리의 뜻을 전하고자 했다. 독립선언서 첫 머리가 ‘조선이 독립국이요 조선인이 자주민’이라고 표현된 것도 그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 당시의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절절하고 벅찬 느낌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인천도 이러한 독립만세운동의 대열에 합세해 인천의 여러 지역으로 확대됐음은 학술대회를 통해 많은 사실들이 밝혀진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해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은 만세운동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하다. 이미 학술대회를 통해 만국공원의 그 역사적 의미가 이야기 됐음에도 불구하고 만국공원은 그저 응봉산 일대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으로 기억되고, 주변에 제국주의 상징물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어찌할 수 없었기에 무기력하게 주권을 상실하기는 했어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전국적인 대표자 모임을 처음으로 가진 곳이 바로 이곳 만국공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1919년 4월 2일 제1차 13도 대표자 대회가 이곳 만국공원에서 열린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1개월이 경과한 시점의 국내 정세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했을 터인데도 전국대표자 대회가 비밀리에 열린 것이다.
이후 13도 대표자 대회는 같은 해 4월 23일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통해 한성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 한성정부는 곧 1919년 4월 13일에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로 합쳐지고, 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정부로서 인정되는 것이다.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유지할 수 없으니 망명지에서 세운 것이다. 임시정부를 내 땅에 세우지는 못했어도 비장한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임시정부는 이제 대한제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민주국가요 민주공화정부를 세운 것이다.

지금 온 세계는 경제불황에 빠져있고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우리 역시도 이러한 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고 그 고통을 감수하며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지자체는 지자체대로 대안들을 내놓고 있지만 그다지 쉽지는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시련에 굴하지 않고 잘 이겨낼 것이라 믿는다. 나라를 잃고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저들의 심장부에서부터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했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누구도 이러한 운동을 강요하지 않았고 오로지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감수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초들의 마음을 담아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모두들 헌신했던 것이다. 우리 앞에 놓여진 경제적 위기는 약간의 고통은 될 수 있지만, 나라를 잃었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시련에 굴하지 않고 역경을 이겨내 왔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믿었고, 그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건국 90주년을 맞이하며 모두가 희망을 가지고 호탕하게 웃으며 시작하는 새해가 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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