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진삼(객원논설위원/건축비평가·광운대 겸임교수)

 예전엔 어렵사리 공부해 건축사 시험에 합격하면 으레 개인건축사무소 개업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건축사 면허증이 하늘의 별 따는 것만큼 힘들었을 때의 일이다.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한 해에 수백 명씩 배출되기를 십 수 년, 건축사 면허증이 남아돌 정도로 흔해졌다. 전국적으로 1만5천 명이 넘는 건축사 가운데 절반만이 대한건축사협회 소속 건축사무소에 등록돼 있고 나머지 절반은 개인적으로 면허만 소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건축사무소에 건축사 면허를 등록하고 있는 경우에도 다수는 월급쟁이 건축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건축사 면허증을 땄다고 냉큼 개인건축사무소를 개업하는 경우는 흔치 않을 뿐더러 쉽사리 개업의 용기를 내는 경우도 드물다.

국내에서 건축사무소 직원 1천 명의 시대가 열린 지도 꽤나 오래 됐다. 10년 전 IMF 직후 유사 규모의 공룡 건축사무소가 된서리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최근 경제 불황기를 전후해 1천 명의 직원을 둔 초대형 건축사무소가 다시 주목되고 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저들 공룡사무소가 급격한 구조조정의 단계에 들어가지 않고 오래 버티기에 돌입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10년 전 악몽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다행이고, 축복임에 분명하지만 한편으론 공룡사무소 간 벌이는 눈치작전도 한몫 거들고 있는 셈이어서 불안함이 적지 않다. 현재와 같은 직원 500명 이상 1천 명 전후의 공룡사무소가 건재한 배경에는 대형 건설사가 주도하는 턴키프로젝트의 수혜를 받고 있는 이유가 크다.

대형 건설사의 눈칫밥을 먹고 있는 공룡사무소 간 치열한 견제와 경쟁으로 인해 불어난 몸집을 쉽사리 뺄 수도 없는 가장 큰 이유로 경쟁사의 음해공작에 휘말릴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구조조정 한답시고 요란을 떨어본들 공연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꼴이니 만큼 막판까지 버텨보자는 심산이 작용한 것이다. 사무소 내부 사정과 무관하게 끊임없이 나도는 악성루머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또한 건축사무소의 규모를 보고 일을 주는 사회 풍토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과거에는 설계수주의 최대 관건이 건축사 개인의 디자인 능력에 좌우됐다면 현재는 건축사무소의 규모와 조직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은 사라지고 기업의 힘이 디자인의 질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

흔히 스튜디오 형식의 소규모 건축사무소를 운영해오고 있는 독립 건축사들은 평생 좋은 디자인의 건축을 추구하는 것에서 직능의 기쁨을 느낀다고 말한다. 작은 건물일지 언정 작품성을 듬뿍 담아낼 때에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소규모 건축사무소를 찾는 건축주들 대부분이 풍족한 자금을 바탕으로 집을 짓겠다는 의지보다는 저예산으로 설계와 시공을 주문함이 태반이어서 건축의 질이 떨어지고 종래는 건축사의 디자인 의지를 죽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그로써 새로운 일이 수주되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에 엮인다는 사실은 소규모 건축사무소의 건축사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건축사도 좋은 건축을 생산해낼 기회가 주어져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나날이 영세해지고 급기야는 직원 한 명 없는 명함 건축사로 떠도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사회전반에 PQ와 같은 사전 설계자격 심사기준의 제도가 통용돼 갓 건축사 면허증을 딴 신진 건축사는 제대로 된 설계 일의 수주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당한다. 신진 건축사가 실적이 있을 리 만무하니 설계할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어렵게 공개경쟁인 현상설계에서 당선해 일거리를 만드는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끈끈한 학연, 혈연, 지연의 관계망을 통해 설계 일을 수주하는 것이 통상의 법이 됐다. 그렇게라도 입신할 수 있다면 행운아다.
요즘처럼 민간발주의 설계 일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는 다수의 소규모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건축사들은 빈사상태에 봉착해 있다고 하는 것이 맞다. 상대적으로 공룡사무소는 먹잇감의 대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수주사냥에 나서고 있다. 마치 대형할인마트가 동네 슈퍼를 집어삼키듯 하는 양상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들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대형건설사들의 설계겸업의 법제화 조짐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일정 수의 건축사를 보유한 건설사는 직접 건축설계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달라는 주문이다. 지난 정부에서는 답을 얻지 못했던 건설사들이 이번 정부에서는 성사 기대감에 충만해 있다. 일이 그 지경에 이르면 현재의 공룡 건축사무소도 위태로운 지경에 이를 것이 자명하다.

한편 일거리 없이 빈둥대던 독립 건축사들 중 상당수는 건설사의 돈 잔치에 수혜를 입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속단은 금물이다. 당장은 상징적으로 몇몇의 건축사들이 중용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건축사의 양산체제와 더불어 건설사의 직원 건축사 자체 수급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까. 이래저래 현재의 독립 건축사들은 드높은 파고에 휩쓸릴 가엾은 존재로 전락돼 있다.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기 어려운 그들은 오늘도 작은 일이나마 건지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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