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갔는데 그때 음악은 그저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나 그렇지 않으면 학교에서 부르게 한 일본 군가, 일본 동요 등이었지. 우리 동요 같은 것은 안 가르쳐주니까. 그것이 전부였는데 입학식 날 소위 ‘브라스밴드’라는 악대를 보고 난 깜짝 놀랐지.”
이렇게 일제침략기 당시 사회상을 보여주듯 모든 음악들이 일본 중심으로 흐를 때 ‘한국의 뱃노래’를 집대성한 김순제(88)교수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한국인 음악 교사가 총지휘한 밴드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 또 다른 음악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심취하게 된다.

김 교수는 당시 중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자신이 음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끔 만든 시기며, 또 음악을 제대로 알았던 때였다고 강조했다.

  # 중학교 때 정사인 선생 만나

이렇게 김 교수에게 폭넓은 음악 세계를 접하게 해 준 장본인이 바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군악대 대원에 입대해 독일인 F. 에케르트에게 사사한 뒤 ‘이왕직양악대(李王職洋樂隊)’ 단원으로 활동한 정사인(鄭士仁, 1881~1958)선생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연주가, 작곡가 등으로 이름난 정 선생은 지난 1916년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악대를 지휘하면서 관악의 발전에 기틀을 다졌고, 그 뒤 한국전력, 철도국 등의 관악대 지도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플루트 연주와 작곡활동에 매진한 정 선생은 행진곡인 ‘추풍’, ‘돌진’ 등과 신민요 ‘태평가’, ‘늴리리야’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정 선생이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브라스밴드’를 지휘할 당시 김 교수는 너무 신기한 나머지 매일 연습장 유리창 사이로 지켜보는데 그때 정 선생이 김 교수의 열정을 보고 하루는 “야! 이놈아 너 나팔 불고 싶어”라며 김 교수에게 다가왔다.

밴드 연습장을 꼭 일주일째 되던 날 정 선생에게서 이런 질문을 들은 김 교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예”라고 답했다.

그러자 정 선생은 “들어와”라고 한 후 코넷(놋쇠로 만든 악기로 피스톤에 의한 관장변화장치가 있으며, 모양이 트럼펫과 흡사하고 음색도 비슷한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발명된 금관악기)을 주면서 “이 악기 소리 한 번 내봐”라며 테스트 아닌 테스트를 했다.

그런데 예상 외로 김 교수가 한 번에 ‘빵’하고 소리를 내자 “야 이놈 봐라! 너 나팔 불어봤어?”라며 칭찬을 했고, 이때부터 김 교수는 정 선생과의 인연을 맺으며 ‘브라스밴드’ 대원으로 들어간다.

당시 트럼펫 불던 사람이 병환으로 그 자리를 비워 대원을 찾고 있던 중 정 선생의 눈에 김 교수가 들어왔던 것이다.

당시 정 선생은 자신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독일의 음악가 에케르트(1852~1916)를 따라 독일 유학을 떠날 기회도 있었지만, 결국 정 선생은 고향에 머물며 지난 1930년대 축음기판에다 ‘내 고향을 이별하고’라는 노래를 낸다.

당시 이 노래는 전국을 감동시킬 정도로 유명했고, 중학교 1학년 때 정 선생에게 이 노래를 배운 김 교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회상하면서 펑펑 운 적이 여러 날이었다고 한다.

또 브라스밴드에서 6개월간 코넷을 배운 후 2학기 때부터 솔로로 연주했을 정도로 음악에 남다른 끼가 있었던 김 교수는 졸업 때까지 계속 코넷에만 매달려 연주했었다.

그 코넷으로 인해 김 교수는 나중에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에 들어갈 때와 그 음악학교 시절에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 고등음악학교 진학 후에도 정 선생 자주 찾아

송도중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에 들어간 후 아버지처럼 모셨던 정 선생을 가끔 찾아갔다는 김 교수는 아주 특별한 날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취주악곡에 ‘추풍’, ‘돌진’ 등 군악대에 가면 정 선생의 작품의 악보를 찾아볼 수 있었을 당시 어느 날 김 교수가 정 선생을 찾아가자, 정 선생은 대뜸 어떤 곡을 던져주면서 “야! 나는 경험으로 귀만 가지고 뭐 작곡했는데, 너는 정식으로 공부하지 않았느냐”며 “이거 가지고 가서 격식에 맞지 않는 거 있으면 좀 뜯어고치고 해서 다듬어주지 않을래?”라며 부탁을 했다.

그 모습을 본 김 교수는 자신이 모르는 것은 제자를 불문하고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해결하는 정 선생를 보고 감동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또 김 교수는 “정 선생은 나팔을 부르면서 눈물도 흘리고, 수업시간에 잘못한 학생에게 매를 든 후에도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 학생에게 마음을 표출하는 등 순정적인 양반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또한 김 교수는 정 선생을 순정적이면서도 정말 굽힐 줄 모르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라고도 평가했다.

당시 일제침략기 시절 교련대위라면 허리 옆에 칼을 차고 다릴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런 준재에게 맞설 정도로 대담한 사람이 바로 정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교련대위가 정 선생을 보고 “여보 당신은 말야, 밤낮 나팔통이나 들고 다니고 뭐 하는 거야”라며 비꼬자, 정 선생은 바로 “당신은 칼만 옆에 차고 다니면서 뭐하고 다니는 거야”며 반박했다.

이 소문이 학교로 퍼지며 정 선생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 ‘정 선생 만남을 천운’으로 여겨

이런 정 선생에게서 음악의 또 다른 세계를 접한 김 교수는 “지금까지 우리의 음악을 찾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여기까지 나를 오게 한 사람”이라고 정 선생을 자랑했다.

김 교수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항상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야 한다”면서 “사람이 사람을 사귀는 만큼 어려운 일이 없기에 내가 정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은 하늘이 내려준 천운(天運)이었던 같다”라고 회상했다.

그런 정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김 교수는 “정 선생은 나에게 음악을 알게 해준 사람이고, 음악의 길을 가도록 인도해 준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면서 “지금도 그 정 선생을 생각하면 내면에서 무언가 치밀어오르면서 다시금 마음을 잡게 된다”라고 말했다.

< ※다음 편 소개=다음 7편은 김순제 교수의 해방 이후의 생활들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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