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덕분’이라는 말이 뭔지 알아? 큰 덕(德), 나눌 분(分)이거든. 그래서 그놈의 ‘덕분’에 내가 오늘날까지 요만큼된 것 같아. 부모님, 제자들, 친구들 다 이들 덕분에 지금 내가 있거든. 앞으로 그 분수를 잘 지킬 줄 알아야 할 텐데.”
‘한국의 뱃노래’를 집대성한 김순제(88)교수는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지금의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그 공을 돌리고 있다.

   
 

일단 김 교수는 해방 직후 서울 입성에 앞서 개성중학교에 들어간다. 개성중학교에는 체육교사가 없어 김 교수가 음악과 체육을 같이 맡았다.

나름대로 어린 시절 많은 장난으로 인해 다져진 몸이라서 인지 체육을 가르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어려웠던 것은 해방 직후라서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음악계에도 미쳐 상당한 줄다리기를 했었다는 것.
그나마 우익에는 음악교사가 별로 없어 그렇게 크게 싸우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방 후 어지러운 사회 속에 김 교수는 3년 만인 지난 1948년 서울로 입성하게 된다.

서울로 입성한 김 교수는 곧바로 ‘조선 협객’으로 불리던 김두한을 찾아가 24인조로 구성된 경전밴드 지휘를 맡는다.

당시 밴드는 나운영 선생이 지휘한 지금의 군악대인 ‘브라스밴드’와 ‘서울시청브라스밴드’가 전부였다.

그러나 서울시청브라스밴드도 경찰밴드의 하나라 일반단체 밴드는 경전밴드가 유일했다.

김 교수가 지휘를 맡은 경전밴드는 매일 아침마다 모여 ‘스자 행진곡(미국곡)’, ‘구우 행진곡(독일곡)’ 등을 연습하면서 행사란 행사를 다 쫓아다니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이렇게 열심히 연습과 행사를 이어온 경전밴드는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터지면서 해체된다.

그러나 김 교수는 경전밴드 지휘를 하면서 당시 성동고등학교와 ‘서라벌예대’에 강사로 나갔다. 여기서 서라벌예대는 당신 종로 4가에 위치한 ‘음악전문학교’와 남산에 위치한 ‘문예창작 전문학교’를 합쳐 만들어진 학교였다.

당시에는 학생모집을 6월에 한 관계로 한창 김 교수가 서라벌예대에 들어가 학생들을 맞이했는데, 그만 6·25전쟁이 터져 학생들과 김 교수는 한 시간도 마주앉아 공부를 해보지 못하고 흩어지기도 했다.

김 교수는 전쟁으로 인해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할 일이 없어 그냥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전쟁은 북한군의 기습으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남한의 패배로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됐고, 국군이 서울로 들어오는데 김 교수는 그 기쁨을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국군을 환영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한편 김 교수는 6·25전쟁 시절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그 내용은 북한군이 들어왔을 때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숙청을 당할 뻔했다는 것.
어느 날 집에 가는데 집 근처 지서(경찰서 지구대) 주임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갔는데 그 주임이 “김 선생 부역했지?”라고 물었고, 김 교수는 “무슨 소리야. 난 그 동안 영등포에 있었는데”라고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 주임은 부역을 했던 명단이 적힌 명부를 김 교수에게 내보이며 “이거 당신 이름이 적혀 있는 부역명부야. 위에서 내려왔어”라고 화를 내면서 말했고, 역시 그 명부에는 김 교수의 이름이 119번째로 적혀 있었다.

   
 
김 교수는 “난 그런 일 없다”라고 정색을 하자, 그 주임은 갑자기 웃으면서 “재수 좋구만. 이 명부에서 팔십몇 번까지 죽어나갔지”라며 김 교수에게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위급한 시절을 보낸 김 교수는 해방 이후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강사생활을 하면서 이곳저곳 피난살이를 했다.

피난민을 따라 흘러 흘러 충남 예산, 대구, 전북 군산(군사사범학교) 등을 거쳐 1958년 드디어 인천과 인연을 맺는다.

여기서 잠깐 김 교수의 결혼이야기를 들어보겠다.
2남 1녀를 둔 김 교수는 해방 전 한참 일본이 우리나라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제학도병을 징집할 당시 학도병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사범학교 교사 자격증 시험을 볼 때 부인을 만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발표한 마해송(1905~1966)선생의 조카였던 부인과 계속 연애를 하다가 한때 부인집안의 반대로 결혼을 실패할 뻔 했다.

당시 부인집안은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마해송 선생의 입지가 상당히 컸다고 한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던 김 교수가 사윗감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장모가 “딸 시집을 보내는데 왜 참견이냐”는 말까지 할 정도로 마해송 선생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그러든 어느 날 마해송 선생이 김 교수와 술자리를 하면서 고리가 풀려 결혼을 승낙하게 된다. 그것은 마해송 선생의 핍박 아닌 핍박에 당당히 대응하는 고집에 반해 결국 마해송 선생이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렇게 험난한 결혼 승낙을 받은 후 개성에 있는 명덕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살림을 개성에서 차린다.

결혼 후 첫 딸과 두 아들을 낳고 6·25전쟁이 터져 피난을 가는데, 부인과 자식은 친척이 있는 충남 예산으로 가고 김 교수는 대구로 가면서 부인과 헤어진다.

그리고 다시 김 교수가 군산사범학교로 오면서 가족이 재회를 한다. 이후 김 교수는 군산에서 5년 넘게 살다가 인천으로 이주한다.

          

< ※다음 편 소개=다음 8편에서는 김순제 교수가 인천으로 이주하면서 인천교대와의 인연과 ‘뱃노래’ 수집의 배경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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