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요는 노동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정해진 가사나 가락이 없고, 어떠한 현장의 상황, 지형, 기분 등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가사와 가락이 바뀌듯이 뱃노래도 일의 종류, 모습, 도구, 동작, 일터의 지세(地勢), 기후 등에 따라 그 소리가 바뀝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 리듬이나 규칙이 있기에 어떠한 외국노래보다 창작적이고 독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뱃노래’를 집대성한 김순제(88)교수는 6·25전쟁이 끝나고, 군산으로 가면서 가족들과 상봉하고 다음 5년 8개월 동안 군산사범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한다.

그리고 지난 1957년경 군산사범학교로 인도한 교장이 다시 인천으로 전근을 가면서 “군산사범학교에서 나를 많이 도와줘 정말 고맙다”면서 “인천에 가서도 날 좀 도와달라”고 제의한다.

하지만 1년이 넘었는데 소식이 없어 김 교수는 모두 포기를 하고, 예전에 근무한 적이 있는 서울 서라벌예술대학(당시 2년제)으로 자리를 옮기려 발령요청공문을 문교부에 제출한다.

 # 어렵게 맺은 인천(교육대학)과의 인연

자리를 옮기기 전 김 교수를 인천으로 데리고 가려고 한 교장을 먼저 찾아가 서라벌예술대학으로 간다고 하자, 그 교장은 깜짝 놀라며 그냥 차를 불렀고 그 차는 곧바로 문교부로 들어갔다.

문교부 총무과로 들어간 교장은 “여기 김 선생 사표 들어 왔어요?”라고 묻자, 총무과 직원의 대답을 들은 후 그 사표를 건네 받은 교장은 그 자리에서 사표를 받아 그냥 그 자리에서 북북 찢어버리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본 김 교수는 놀랐고, 교장은 곧바로 총무과 직원에게 “이 김 선생을 인천으로 전근발령을 내 주시오. 내 공문 바로 올리겠소”라며 인천으로 발령을 냈다.

일단 평교사로 발령을 받은 김 교수는 그때부터 인천과 인연을 맺게 된다.

평교사 자격으로 인천으로 온 김 교수는 당시 어려운 시국이라 각 지역에서 데모가 일어났고, 인천교육대학(현 경인교대) 설립을 놓고 인천과 수원 간의 대립이 일고 있었다.

당시 수원 측에서는 인천은 변두리이고, 수원은 경기도 중에도 중앙에 위치했기 때문에 당연히 수원에 교육대학이 건립돼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여기에 김 교수가 교육대학을 인천으로 유치하기 위해 팔을 거둬붙이는데 분위기는 수원 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고민 고민한 끝에 김 교수는 당시 정치계에서 군인들의 파워가 세다는 것을 알고 개성중학교 시절 제자 중 군에 근무하는 제자들을 이용한다.

제자들의 도움으로 교육대학을 인천으로 유치한 김 교수는 초급대학 이상의 자격을 갖춰야 교수에 임용되는 규칙에 예과 및 본과 3년, 서라벌예술대학 등을 거쳤기 때문에 논문을 쓰지 않아도 교수 임용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문교부에서 연락이 와 가보니 “논문을 써야 할 것 같은데요”했고, 놀란 김 교수는 “아니 왜요. 난 교수경력이 있는데”라고 하자, 직원은 “모르셨군요. 서라벌예술대학이 재단으로 학교인가가 나지 않았거든요”라고 김 교수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할 수 없었던 김 교수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논문제작에만 열중해 ‘한국음악 교육사적 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학위를 받았다.

이렇게 거친 길을 건너 인천교대와도 연을 같이 한 김 교수는 서서히 자리를 잡으면서 뱃노래 조사에 발을 들여 놓는다.

 # 대천해수욕장에서의 첫 경험 ‘바다소리’

인천교대에서 화성학, 지도법 등을 강의하던 김 교수는 천성이 음악이라 하루는 강의에 지루함을 잊으려고 가족들과 함께 충남 대천해수욕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텐트를 치고 화장실도 없고, 밤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그 바닷가에서 자려고 하는데 먼바다에서 불빛이 반짝반짝 비치면서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밤새도록 들렸다.

간밤에 그 소리가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자, 김 교수는 그 소리의 궁금증을 풀려고 옆 동네 한 노인네를 찾아가 간밤에 들렸던 소리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을 했고, 그 서명을 들은 노인네는 “바다소리야”라고 한마디를 던진다.

“바다소리가 뭐예요”라고 김 교수가 묻자, 그 노인네는 “뱃사람들이 고기를 잡아서 퍼올리는 소리지”라고 설명했고, 그 소리가 뱃사람들의 소리라는 것을 안 김 교수는 순간 머리 속에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뱃노래를 파고들어야겠다고 결정한다.

이때부터 ‘이것이 우리의 전통음악을 아닐까’하는 마음에 구형 녹음기를 짊어지고 뱃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김 교수와 한국의 뱃노래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뱃사람들은 ‘뱃놈’이라고 주위에서 형편없는 사람으로 여겨졌던 탓에 뱃사람들이 선뜻 김 교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뿐 아니라 뱃노래는 단체 노래라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 교수는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이 묵는 여관으로 초대해 술과 담배 등을 대접하는 등 갖은 방법을 총동원해 녹음을 이어갔다.

그러나 뱃노래 수집에 나선 김 교수의 어려움은 이뿐만 아니었다. 뱃사람이라는 편견으로 자신들을 꺼리는 육지 사람들의 질시로 인한 견제와 함께 발동기가 있어야 작동되는 릴테이프, 그 릴테이프를 지고 한라산까지 올라갔는데도 허탕을 친 일, 다른 좋은 녹음테이프가 나왔는데 복사하는 과정에서 실패한 일 등등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지금의 뱃노래를 집대성한다.

이렇게 김 교수는 ‘한국의 뱃노래’를 지난 1972년 7월 16일부터 1978년 8월 18일까지 6년 여에 걸쳐 경기도, 충남, 전북, 전남, 강원도, 경북 등의 해안을 돌며 총 405곡을 녹음하게 된다.

또 5차에 걸쳐 수집한 뱃노래를 총정리해 ‘우리나라 동·서·남해 지방 뱃노래의 비교 연구’라는 논문을 3편으로 나눠 발표했다.

이같이 우리 전통음악의 큰 획을 그은 김 교수는 후회는 없지만, 녹음기가 좀 더 빨리 발달돼 10년 정도 일찍 시작했더라면 더욱 가치 있는 자료를 남길 수 있었음을 못내 아쉬워했다.

아직도 그 열정이 몸속에 남아 있는지 뱃노래뿐 아니라 다양한 전통노래를 찾아다니고 싶어하지만, 말없이 지나가는 세월이 밉기만 하다고 한숨을 내쉬고 있다.

    

< ※ 다음 편 소개=다음 9편에서는 은 인천교대 교수가 된 김순제 교수의 교수생활과 한국 뱃노래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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