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난 또 교사를 하고 싶어. 왜냐하면, 그 동안 교사를 하면서 제자들에 성심성의껏 가르치지 못했던 것 같아. 교사는 항상 학생들에게 가르칠 것을 연구하고 준비해서 강의해야 하는데 내일은 어디 가지, 모레는 또 어디 가지 등 이런 생각만 머리에 가득찼었으니까.”
지금의 ‘경인교육대학교’의 전신인 ‘인천교대’를 인천에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한국의 뱃노래’를 집대성한 김순제(88)교수는 제자들이 “교수님 다시 태어나면 뭐하고 싶어요?”고 물을 때면 못내 미안한 마음에 이렇게 대답을 한다.

이는 자신이 한평생 뱃노래 수집에 모든 것을 바침에 따라 제자들에게 정열적인 교육을 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 김순제 교수의 교수관(觀)

이렇게 지난날을 생각할 때 자신의 제자들에게 가장 미안하다는 김 교수는 인천교대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교사라는 위치와 교수라는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다분히 자리 차원이 아니라 교수신분에서의 교육법이 교사와는 다르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다.

인천교대에서 음악지도법, 화성법 등을 비롯해 합창수업을 가장 많이 한 김 교수는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교사가 교수가 되려면 참 많이 공부해야 한다”면서 “내가 아는 전문분야만 가르쳐준다는 것은 지식전달이지 교육자가 할 일은 지식전달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런 그가 “그땐 그것을 모르고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속 빼서 가르쳤고, 그것도 잘 가르치지 못했다”면서 후회를 하면서 “제자들 볼 면목이 없다”라고 미안해했다.

김 교수는 교수법에 대해 “지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이가 알고 있는 것을 교육할 때 상대방인 학생들이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할 때 그것은 교수법이 잘못됐기 때문이다”면서 “그것은 교수가 연구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또 그는 “요즘에는 학생들이 하는 것을 교수들이 이해를 못하고들 있다고 하는데 이 또한 교수들이 연구하지 않는 것이다”면서 “교육자는 자신의 것만을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과 같이 서로 정보전달을 하면서 서로의 입장을 잘 정리하면서 교육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자”라고 설명했다.

  # 문화재위원으로서 활동영역 확대

자신의 교직생활을 되돌아 보면서 진정한 교육자의 길을 후배들에게 일러준 김 교수는 당시 경기도에 속했던 인천지역에 인천교대가 있었고, 그 인천교대에서 교수생활을 하던 김 교수는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돼 여러 가지 음악을 수집해 문화재로 등록시키는 일도 함께 하게 된다.

현재 문화재라면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능 및 예능문화재 등으로 나뉘는데 당시에는 나뉘지 않고 그냥 문화재로 통합돼 위원 20여 명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뱃노래를 수집하고 있던 김 교수로서는 육지노래도 수집할 수 있는 기회가 됐고, 많은 노래를 수집하면서 문화재로 남겨 후대에 남기고 싶은 노래도 있었던 터라 활발하게 문화재위원 활동을 했다.

당시 다른 문화재위원들은 용역을 줘서 발굴해 문화재 등록을 신청한 반면, 김 교수는 음악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없어 용역을 줄 수 없었던 터라 직접 발로 뛰면서 조사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강화도를 중심으로 경기도 일대를 돌며 여러 편의 음악을 문화재로 등록을 했다.

특히 당시 포천에서 즐겨 불렀던 ‘메나리’라는 노래들을 수집해 문화재로 등록을 했다고 한다.
하루는 어느 교장의 소개로 포천을 들렀던 김 교수는 ‘메나리’라는 노래를 동네 사람들이 ‘교창창법’이라는 창법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흥미를 느껴 매주 그곳을 찾게 된다.

그래서 매주 포천에 들러 노인들을 모아 그 노래를 수집했고, 그 창법과 ‘메나리’라는 노래 자체가 희귀해 문화재로 신청, 현재 ‘시도무형문화재 제35호(포천시)’로 지정돼 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메나리’의 문화재 지정에 김 교수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은 문화재 지정 당시 인천이 경기도에서 분리돼 ‘인천직할시(현 인천광역시)’로 변경되면서 경기도 문화재로 들어갔다는 것.
이후에도 김 교수는 뱃노래뿐만 아니라 노동요, 무속, 불교, 기독교 등을 돌며 노래들을 수집하면서 문화재위원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김 교수는 무속에도 관심이 많아 조사를 하는데 육지노래와 절대적인 관계가 있는 것을 안다.

어느 날, 김 교수는 친구의 소개로 강화에서 ‘고창 굿’을 한다는 얘길 듣고 가서 연구를 시작한 후 인천의 있는 무당들을 찾아다니면서 연구를 하게 된다.

‘석바위만신님’으로 불리는 김매물(현재 인천황해도굿 보존회장), 이선비, 황해도 출신 무당 중 가장 큰 무당으로 꼽히는 김금화 등을 찾아다니면서 무속연구를 거듭한다.

이렇게 김 교수는 우리나라에 있는 전통음악을 직접 찾아가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그 섭리들을 몸으로 접하면서 음악에 대해 정리를 하는 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접하는 음악 외에는 멸시한다는 점이었다.

음악과 마찬가지로 각 종교단체, 지역 등에서 행하는 일련의 활동들은 나름대로 규칙과 규율에 따라 이뤄지기 때문이나 그럼에도 서로가 존중해야 한다고 김 교수는 지적한다.

이에 김 교수는 “그것을 연구한다고 하면 같은 연구자인데도 무시할 정도로 우리 사고방식은 낙후돼 있다”면서 “‘나의 것이 최고다’라는 편견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것을 연구하고 또 그것이 얼마나 교육적 의미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우선이다”라고 충고했다.

 # 시도무형문화재 제35호(포천시) ‘메나리’

포천지역에서 불리는 ‘메나리’는 본래 논농사에서 두 번째 논매기를 하며 부르는 김매기 소리를 말한다.
원래 강원도와 경상도와 충청도 일부 지방에서 농부들이 논의 김을 맬 때 부르는 노동요로, 이름은 산유화(山有花)를 풀어서 ‘뫼몰이’라 한 것이 메나리로 됐다는 설과 옛 민요 ‘미나리꽃은 한철이라’하는 데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우리나라의 김매는 소리는 대개 메기고 받는 방식으로 부르는 데 비해 포천 메나리는 한 절을 5개 부분으로 나눠 각 조가 각각 부르는 점이 특이하다. 각각의 5개 부분을 메기는 소리, 지르는 소리, 받는 소리, 내는 소리, 맺는 소리 등이라 한다.
포천 메나리 일하는 일꾼들 전원이 모두 일과 노래에 참여함으로써 노동의 능률과 함께 흥을 돋우어 어려움을 잠시나마 잊게 한다. 메기고 받는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소리꾼 모두가 다섯 부분으로 나눠 부르는 독특한 형식의 노동요로 전통사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전통을 지녔다. 
  <※ 다음 편 소개=다음 10편에서는 김순제 교수가 한국 뱃노래를 수집하면서 ‘시선배’에 푹 빠지게 되는데 그 ‘시선배’와의 인연에 대해 들어보고 그 의미를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