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노래를 수집하러 다니면서 간첩으로 몰리기도 해봤고, 상여소리를 녹음하려다 몰매도 맞아 봤고, 시원한 막걸리에다 맛있는 점심도 많이 얻어먹었지. 지금 지난 시절을 생각해 보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기억들은 절대 잊을 수 없는 보물이야.”
‘한국의 뱃노래’를 집대성한 김순제(88)교수에게 뱃노래와 우리 민요를 수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고, 많이 생각나는 기억을 물어보자, 당시 있었던 모든 일들을 하나도 빼놓을 수없이 소중한 기억들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당시 재미있고, 황당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던 일들 몇 가지를 회고했다.

  # 강원도 삼척에서 간첩으로 몰려 곤욕

지난 1973년께 김 교수는 강원도 삼척 쪽에서 동해 뱃노래를 녹음하러 갔는데 간첩으로 몰려 파출소로 끌려갔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었던 일은 경찰의 요구대로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증명서를 다 제출했는데도 경찰이 아무런 반응이 없고 전화만 하자 김 교수는 “사람 갖다 놓고 뭐하는 것이요. 기다리는 것도 분수가 있지, 출장증명서까지 다 내놨는데”라고 화를 냈다.

그러자 경찰은 “간첩 치고 증명서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없다”면서 “상부지시가 올 때까지 같이 있어야 한다”라는 대답만 했다.

얼마 후 상부의 지시가 떨어져 신분을 확인한 경찰은 김 교수를 보내줬고, 김 교수는 기분이 좀 상했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동해, 남해, 서해, 경기도 등을 돌면서 뱃노래를 녹음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바다를 다 돌았는데도 단 한 번도 경찰이나 다른 어떤 민원을 받아보지 않았던 김 교수는 이상한 나머지 경기도경찰국을 찾아 물어보니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다른 지역으로 갈 때 경찰끼리 김 교수의 신분을 인계하는 등 또 다른 절차가 필요없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을 듣고서 그 상황을 이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김 교수는 삼척 오분리라는 곳을 찾아 노젓는 소리를 녹음하는데 그 동네 약방 주인의 도움으로 동네 사람 동원과 그 약방주인 며느리가 차린 점심 식사 등 많은 도움을 받고 쉽게 노래를 녹음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해 남해를 돌아 다시 노 젖는 소리를 녹음하려고 양손에 선물을 들고 오분리를 찾았지만, 그 약방 주인은 이미 작고하고 난 다음이고 당시 며느리의 눈물을 보면서 정말 가슴이 아팠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김 교수는 삼척 오분리에서 녹음한 노 젖는 소리와 그 약방 주인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 속초에서 북한 함경도 뱃노래 녹음

그리고 속초에 가면 조그만 섬이 있는데 함경도 사람들이 6·25 전쟁 때 피난와서 정착한 곳으로, 어부들이 많아 함경도 뱃노래를 한꺼번에 수집할 수 있었다.

당시 북한으로 가서 북한의 뱃노래를 녹음할 수 없었던 김 교수로는 정말 큰 수확 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또 경기도 이천에서는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뱃노래와 똑같은 방식으로 제목도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어 신기한 나머지 녹음과 함께 제목을 붙여준 적도 있었다.

여기서는 한 사람이 매기면 여러 사람이 받고, 또 두 무리로 나눠 한 무리는 매기고, 한 무리는 받고 하면서 ‘짝짓기’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노래였다.

그래서 김 교수는 그 ‘짝짓기’라는 이름이 신경이 쓰여 여기저기 자료를 뒤져 ‘소리 모으기, 섬 모으기 등 힘을 합쳐서 낸다’해서 ‘힘내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런 말이 어디 있느냐”고 반박을 했지만, 김 교수는 “찾아 듣는 사람이 뜻만 알면 되지”라며 끝까지 ‘힘내기’라고 하면서 고집을 피운 적도 있었다고 한다.

 # 부친 안장 때의 달구소리에 담긴 일화

이런 뱃노래와 노동요를 녹음하면서 있었던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일화를 들여줬다. 그 일화는 지난 1988년 부친이 작고하고 공원묘지에 묘를 쓸 때 일이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모란공원에 부친을 안장한 김 교수는 그 당시 공원 직원이 부친 가시는 길에 ‘달구소리’를 들여줘야 한다는 제안을 받고 허락을 한다.

하관하고 흙을 다질 때 하는 소리인 달구소리는 당시 그 비용이 50만 원이었다. 그런데 그 달구소리를 들은 김 교수는 매기고 받는 소리가 맞지 않고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참 일하고 난 후 쉬는 동안 그 사람들 곁으로 가서 “소리가 잘 맞지 않네요”라며 “한 사람은 전라도고 또 한 사람은 충청도가 고향이라 소리가 제대로 맞지가 않지요”라며 소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 사람들은 곧바로 전문 소리꾼이 아니라고 실토하면서 비용을 25만 원만 받으려고 했다.

김 교수는 그 공원 직원들에게 “그냥 막걸리나 사서 함께 많이 먹으라”며 그냥 비용 전체를 다 주고 일을 끝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공원을 찾았는데 그때마다 그 사람들이 관리를 해줘서 그런지 묘는 항상 깨끗하게 정리돼 있었다고 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지난 제10편에서 다뤘던 시선뱃노래와의 인연을 빼놓지 않았다. 특히 이 시선뱃노래는 러시아로 음악공부를 갔을 때 러시안인들이 복사를 요구할 만큼 좋은 노래였다고 평을 했다.

또 김 교수는 시선뱃노래를 “수집한 노래 중에 가장 특징적이고, 음악적으로 손색없는 노래다”라고 자랑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준 김 교수는 “일반노래도 마찬가지겠지만, 시대가 흐르면 노래도 변한다”면서 “요새 뱃노래를 부르는 거 보면 많이 달라졌고, 뱃노래 수집하는 것도 없어 매일 아쉬운 마음만 가질 뿐이다”라고 한숨을 쉬었다.

조금 있으면 90세를 바라보는 김 교수는 아직도 그때의 열정적인 뱃노래 녹음 시절을 잊지 못하고 기회가 되면 또 다른 뱃노래 수집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이미 지난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을 때가 많다고 하면서 마음과 같지 않은 몸을 쳐다봤다.

       

< ※다음 편 소개=다음 12편은 김순제 교수가 바라보는 한국 뱃노래에 대한 생각과 우리 민요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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