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3일부터 5월 8일까지 무려 15박 16일 동안 EBS(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를 다녀왔다. 목적은

▲ 박정동(인천대학교 중국학연구소 소장)
단 하나. 지난 12년 동안 대학 부설 산악부로는 전무후무한 대역사(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를 기록 중에 있는 인천대학교 산악부의 에베레스트 최고봉(8천848m) 등정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12년간의 인천대학교 산악부의 발자취를 잠깐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 1998년 5월 북미 최고봉인 맥킨리(6천194m)를 등반해 정상에 등정(강승재 대장 등), 이어서 2003년 7월 유럽 최고봉인 엘브루즈(5천642m)를 등반해 3명이 정상에 등정(유주면 대장 등), 2005년 1월에는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구아(6천962m)의 등정에 성공했고(김광준 대장 등), 같은 해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천895m) 원정과 오세아니아 최고봉 코지어스코(2천228m) 원정도 성공적으로 끝냈다(김준우 교수 등). 2008년 1월에는 남극 최고봉인 빈슨매시프(4천897m)를 유주면 대장과 김동언 대원이 등정해 7대륙 최고봉 등정의 마지막인 아시아 최고봉이자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만을 남겨 놓게 됐다.
언제 마지막 남은 에베레스트 최고봉에 인천대학교 산악부의 깃발을 꼽을 것이냐.
공교롭게도 때는 바야흐로 외환위기로 전 세계가 쑥대밭이 돼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인천대학교
   
 
개교 30주년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고,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인천대 산악부 대원들의 불타는 열정을 쉬 잠재울 수는 없었다. 2009년을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의 해로 잡고 하나하나 준비에 들어갔다. 에베레스트는 다른 원정에 비해 비용과 준비가 남다른지라 2008년 7월 레닌피크(7천134m)를 에베레스트 원정 훈련지로 등정한 후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2009년 3월 23일 지도교수를 포함해 7명의 대원들이 네팔로 떠났다. 그리고 베이스캠프, 캠프1, 캠프2, 캠프3를 오가면서 정상 정복을 위한 훈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물론 정상 정복은 산악부 대원들의 몫이지만 개교 30주년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고 격려 차원에서 교수산악회도 무언가를 해야 되지 않느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물론 경비는 교수 자신들의 몫이다. 6명의 교수들이 동참했다. 산행 왕초보(등산 경력은 예왕산, 청계산 반나절 등반이 전부)인 내가 동참하게 된 동기는 역사상 최초의 대학 부설 산악부 7개 대륙 최고봉 등정에 동참하고 싶어서였다.

# 4월 23일

   
 

 
7시간의 비행 끝에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수작업이다. 공항에 컴퓨터 1대 보이지가 않는다. 짐 검사도 안면이 있으면 그냥 통과다. 소득 240달러 수준이라 하지만 기대 이하였다. 내가 경제자문관을 지냈던 캄보디아보다도 뒤떨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루에 10시간 이상이 정전이 되고, 대낮에도 상점은 깜깜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시내 최대 번화가인 타멜 거리에서 환전을 했다. 1달러에 78루피다. 1루피가 한국돈으로 대략 20원꼴이다.

# 4월 24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간단한 식사 후 공항으로 갔다. 현지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로 공항이 체계가 잘 잡혀 있지 않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공항에서 3~4시간 대기는 기본이다. 운이 좋아 우리는 15분 대기만에 출발할 수 있었다. 14인승 경비행기를 타고 2천804m의 루클라로 출발했다.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은 요란한 진동과 소음을 낸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다. 하지만 덕분에 그 기막히다는 히말라야 파노라마는 스릴만점으로 만끽했다. 부기장이 경험이 없어서 활주로를 놓쳐버렸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서 겨우 도착했다. 모든 것이 아슬아슬하지만 스릴감이 있다.

   
 
공항 입구에는 아직 포터들을 정하지 못한 트레킹 족들을 맞이하기 위해 포터들이 여기저기서 분주하다. 10시 반에 루클라를 출발해 오후 3시에 목적지인 팍팅 -00롯지(난방없다, 나무침대 2개)에 도착했다. 전형적인 산악인들만을 위한 간이역 같은 느낌이다. 세탁은 엄두도 못내고 찬물에 머리라도 감고 싶었지만 감기가 쉬 올 수 있고, 고소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선배들의 조언에 참기로 했다. 이러다가 15일 동안 머리 못 감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롯지 경영자들을 대개 그 지역 주민으로서 네팔 사회에서도 상류층에 속한다. 물론 세금은 없고 대개가 자녀들을 미국에 유학시키고 있다. 자기 몸무게보다도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종일 산길을 걷는 포터들이 하루에 10여 달러의 소득이라 생각하면 이 나라의 빈부격차도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 것 같다.
2천800m에서 2천600m로의 하산길이었지만 산행 왕초보인 나에게는 만만하지만은 않는 코스였다.

 # 4월 25일
 
아침 6시 기상, 간단한 조식 후 출발했다. 팍팅에서 몬조(2천810m), 조르살레(2천805m)를 거쳐 남체바자

   
 
르(3천440m)까지 가는 코스였다. 몬조를 지나면서 체크포인트에서 1천 루피의 국립공원 입장료를 지불하고, 계속 걸었다. 계곡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데, 계곡엔 에메랄드빛 뿌연 빙하 녹은 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계곡 오른편으로는 만년설의 탐세르크가 강렬한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고, 싱그러운 바람은 산행의 분위기를 더욱더 고조시키고 있었다. 남체 직전 마지막 현수교를 지나자마자 곧바로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꽤 가파르고 힘든 구간이었다. 구름 속에 뒤덮힌 채 가끔씩 보이는 콩테를 보면서 중간 중간의 어려움을 날려 보냈다.
저녁 식사 후 드디어 공포의 고소증세(두통증세, 뒷골이 당긴다. 식욕 없고, 구토증세)가 여기저기서 몰려오기 시작했다. 모두 약을 먹고, 항상 머리에 빵모자를 쓰고, 양말 신고, 오리털 파카 등으로 항상 보온 태세에 돌입했다. 일행 중 일부는 저녁 식사도 마다했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아직 별다른 증상이 없었다. 오늘 산행 중에도 왕성한 식욕과 소화관계로 거의 5분 간격으로 방귀도 뀌고, 참다 못해 산행 중 거의 1㎏ 가까운 무게를 자연에 배설하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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