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진삼(객원논설위원/건축비평가·광운대 겸임교수)

 선생님,
사반세기를 한결 같이 새벽바람을 일으키며 시민의 알권리를 찾아주신 큰 도량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어머니의 손을 잡고 문향의 그윽함을 경험했던 어제의 어린아이가 오늘은 자신을 빼닮은 아이의 손을 잡고 예전의 어머니가 앉았던 자리에 둘러앉아 옛날이야기처럼 할머니와의 추억을 말해줍니다. 큰 무대에 올려진 공연예술의 경험이 일천한 시민들에게 관람의 기회를 만들어 예향민의 수준을 한껏 올려놓았기도 했지요. 서울의 그늘에서 늘상 주변부에 머물러야 했던 인천의 후진성을 탈각하고자 유능한 후배들을 끌어모아 인문사회분야의 지식 인프라를 구축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영향력 있는 언로의 기능을 확보한 것은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생님,
일찍이 남들이 돌아보지 않는 인천의 향토사에 관심해 사라져가는 근현대사의 역사유물을 찾아 정비하며, 인천 도시문화의 원형을 복구하려는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에 인천의 역사성은 나날이 깊이를 더해갑니다. 그것이야 말로 인천의 문인들에게서 발견되는 향토애적 유전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교단에서는 제자들에게 시문을 익혀주며, 문학의 시선으로 인천의 정체성을 살필 수 있게 방향을 잡아주셨습니다. 그 영향 하에 얼마나 많은 문사들이 인천을 통해 배출됐던가요? 
선생님,
서가를 벗어나,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인천의 책들을 꼼꼼히 수집해 저간의 산물을 동향의 이웃과 나눠야한다며 작은 다락방을 열어 인천문학의 숨결을 통해 이 지방의 정신문화를 이끌어온 여인의 억척이야 말로 인천사람의 몸에 배인 근성은 아니었던가요? 산업도로의 건설로 반쪽으로 동강난 오래된 마을 배다리의 마지막 숨통이 끊기는 것을 막아보자고 온몸을 던져서 사수하는 연로하신 마을주민들의 고투는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민 다수가 외면해온 그 땅, 그 자리에서 오롯하게 포연 없는 문화전쟁을 선포하고 공권력에 맞서온 그분들의 생활은 지금 얼마나 고단하고 애절하겠습니까?
선생님,
타지에서 와서 인천을 발판으로 문화의 난장을 이끌며 연극무대를 오르내리던 사이 진정 인천사람이 되어버린 시인의 고독한 일생은 차라리 한 편의 인생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누구 한 사람 반기는 이 없어도 홀로 인천을 연모했던 당신이었기에 남기고 떠난 한 구절 한 구절의 인천 시편은 여전히 싱그럽습니다. 당신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또 한 분의 노(老)시인은 270만 인천시민 다수가 외면한 배다리문화축전의 작은 거리천막 아래서 손수 동양화를 치며, 몇 안 되는 방문객들에게 그 비싼 노력의 결실을 선뜻 선물하더이다. 함께 해주어 감사하다는 표식이었겠지요.
선생님,
오랜 시간 차이나타운 화교들의 일상적 문화를 추적해 사진으로 옮기며 인물 근대사를 기록해오는 과정에서 어느 날은 그들의 본국(본향)에까지 따라나서며 이주민의 역사를 공간적으로 내재화시키려는 기획은 얼마나 많은 인내와 노력을 요하는 것이던가요? 그런 노력이 결실이 돼 인천의 기억이 영원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겠지요.
선생님,
이렇듯 인천의 문화판은 당신의 존재감으로 매일 매일이 뜨거운데 세상은 참으로 냉랭하기 그지없습니다. 선생님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참담함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도시의 리더는 크게 괘념치 않아 보입니다.저들의 선생님은 당신네 선생님들과 근본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고, 국적도 다르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선생님들의 한목소리에 이유가 있을 법하니 경청해야겠다는 공직자의 자세가 필요한데도 현실은 선생님들의 의사를 묵살하고, 도리어 의지를 거세하려드는 판이니 우리 사회의 도덕 불감증은 극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오늘 선생님들의 뒷모습을 좇아 닮고자 하는 것만으로도 인천에 발을 붙이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들뜨는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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