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지난 일을 생각하면 그냥 아쉬움뿐이라고 말하고 싶어. 정말 많은 고생을 했는데 그 고생에 대해 나 자신은 아직 만족하지 못하거든, 지난 시간이 아쉽고 남은 시간이 원망스러울 뿐이지.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닌가.”
“따지고 보면 참 바보스런 얘기지 뭐, 그래서 이제 좀 버리고 살자, 좀 편안하게 살자, 이렇게 생각을 하고 생에 대한 욕구, 욕망 등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버리고 그냥 세월에 몸을 던지고 한량처럼 살려고, 허!허!허!”

  # 여유있는 삶으로 음악연구에 열정 쏟아

지난 1922년 한창 일본으로부터 핍박을 받던 시절에 태어나 어려운 일본유학을 거쳐 교직생활, 교수, 뱃노래 수집, 우리의 음악연구 등 한평생을 우리 음악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온 김순제 교수.
아직도 그는 우리 음악의 발전과 계승을 위해 또 다른 연구를 위해 국내는 물론 외국도 마다하지 않고 달리며 수집하고, 연구한 후 그것을 다시 기록으로 남겨 우리 후손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침이 마르도록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나이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88세.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속담처럼 그 또한 그 세월 앞에 한 발짝 물러서면서 잠시 지난 시절을 생각해 본다.

“아직도 할 일이 많다”는 ‘한국 뱃노래의 집대성자’ 김 교수는 “내 나이 이제 88세, 조금 있으면 90세야. 이만하면 평균연령 이상 살았는데 뭐 더 살겠다고 몸부림칠 필요 없고 될 수 있으면 자꾸 버리자고 생각한다”고 요금의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또 그는 “이제 남은 세월 여러 유혹에 휘둘리지 말고,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돈 가지고 치사한 놈이라는 얘기 듣지 말자”면서 “그런 재물, 명예 등 들어오는 유혹을 다 버리고 그냥 교사였던 김순제, 교수였던 김순제로만 알아주길 바랄 뿐이다”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아직도 임석재 선생의 “내가 아흔두 살인데 눈이 잘 안 보이지, 돋보기 쓰지, 확대경 쓰지, 눈물 나지, 졸리지, 큰일 났어. 김 교수 겨우 일흔셋이지?”라고 게으름을 지적해 준 그 말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김 교수는 “다 버려도 우리 음악을 연구하는 열정만은 버릴 수 없다”라고 지금도 이곳저곳 우리 가락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고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문제를 가지고 낳게 된다. 인제 동물도 마찬가지야. 누구한테 배운 거 아닌데 자기 살 길을 찾아 나가거든”이라고 삶을 말하는 김 교수는 “나도 문제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해 일본 들어가서 공부할 때 작곡공부를 해서 유명한 작곡가가 돼 보려다 남의 것을 가지고 곡을 쓰면 뭐하나. 내걸 가지고 써야지”란 생각으로 우리의 음악을 연구하게 된다.

이렇게 서양 음악을 뒤로 하고 우리 음악을 연구한 김 교수는 일본유학 당시 넉넉지 못한 생활에 등록금, 레슨비, 시간적 여유 등이 없어 땀 흘리며 신문을 배달한 그 시절이 가장 즐거웠다고 한다.

“그때 두렵기도 하고 잘사는 애들을 보면 부럽기도 했다”는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도리어 나라는 인간은 그런 환경 속에서 만들어졌고, 그것으로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는 계기가 됐다”라고 회고했다.

그런 생각을 가진 김 교수는 특히 81세 때 모든 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 언어소통, 문화, 치안 등에 많은 고생을 했다는 김 교수는 “적극성을 띤다고 무작정 러시아로 갔을 때 치밀한 계획 없이 떠난 것이 좀 아쉽지만, 그 적극성 자체가 지금의 나를 이끌고 있는 것 같다”면서 자신했다.

또 김 교수는 러시아에 이어 몽골까지 유학을 가려고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많은 주위 사람들은 김 교수의 몽골유학에 대해 “지방, 산골로 돌아다니는데, 도시에도 살기가 어려운데, 지금 나이에 그거 하실 수 있어요?”라면서 “그러지 말고 인제, 살 만큼 사셨으니까 편안하게 사세요”라고 반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 교수는 결국 몽골행을 포기하는데 아직도 그의 마음 한쪽에는 우리의 음악과 거의 흡사한 몽골음악에 대한 조그마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

아직도 우리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삶은 살아가고 있다는 김 교수는 지난 1973년부터 우리의 소리 뱃노래 수집에 들어가면서 서·남·동해의 뱃노래를 1천500여 곡이나 수집·정리했고, 이 중 155곡을 정선해 교창형식, 음계구성, 리듬의 소재 등으로 나눠 정리했다.

  # ‘인천의 인물’로 후학들이 존경과 자랑

지금 우리 음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만약 김 교수가 아니었다면, 한국인의 내면의 소리, 얼의 소리, 소재와 작품의 손색없는 예술혼의 소리, 차별화된 한국인의 소리가 흐르는 바람에 흩어졌을 것이고, 부서지는 파도를 흔적도 없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산수(傘壽, 나이 80세)를 훌쩍 넘어 미수(米壽, 나이 88세)까지 온 김 교수는 아직도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피눈물로 건져낸 순수 혈통의 동요와 한국의 뱃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를 고스란히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이었던 그 소장품이 행여 손상이 될라 노심초사하고 있다. 이제는 김 교수의 그 마음을 우리 후세들이 잘 읽고, 그 테이프들이 조금이라도 더 손상되기 전에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또 다른 교육 자료로 남길 수 있도록 하는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는 우리의 소리를 더 찾고자 하는 욕망이 타오르는 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 같다.

비록 이북에서 태어났지만 많은 활동과 업적을 인천에서 남긴 김순제 교수는 이제 인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많은 후학들이 자랑하고 있다.

이런 김 교수의 업적을 우리 인천에서는 그냥 좌시하지 말고, 우리 후손들은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하면 또 다른 후손들에게 교육적인 자료를 전할지를 고민해야 할 의무가 있다.

         

< ※다음 편 소개=다음 14편은 김순제 교수를 지금까지 취재하고, 그 내용을 글로 옮긴 기자의 느낀 점(취재후기)을 몇 자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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