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소적응 훈련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5천400m)에서 캠프1(6천200m)에 이르는 지역은 ‘아이스폴’이라 불리며 원정대는 이곳을 고소적응과 장비, 식량 등을 옮기기 위해 몇 번을 오르내린다. 고소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르면 멀고도 먼 길이다. 등반 능력이 좋은 셰르파(안내자 겸 고소 포터 역할을 하는 고산족)에게 베이스캠프와 캠프1 사이의 운행시간을 물으니 ‘Slowly 2Hours(천천히 걸어 2시간)’란다.
우리 원정대는 셰르파 수가 유난히 적어 묵직한 배낭을 메고 운행을 해서인지 처음에는 10시간, 두세 번째는 6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네다섯 번째 정상 공격 시에는 고소에도 충분히 적응하고 배낭도 무겁지 않아서 4~5시간 정도면 운행할 수 있었다. 셰르파가 말한 ‘Slowly 2Hours’는 현실보다 조금 과장되게 말한 것으로 그 이후 우리는 어딘가를 힘들게 가야 할 때 운행시간에 상관없이 무조건 ‘Slowly 2Hours’를 외쳤다.
아이스폴 왼쪽은 에베레스트 서쪽 능선, 에베레스트 정상(8천848m)에서 시작해 로라 고개(6천26m)를 따라 쿰부체(6천665m)를 연결하고 있는 가파른 벽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눈사태가 발생하는 곳이다.
두 번째 고소적응을 위해 캠프1을 오르던 중 눈앞에서 눈사태가 발생했다. 약 500m 앞에서 눈이 쏟아져 내리더니 눈앞으로 다가와 얼굴을 눈가루로 적신다. ‘그래 바로 이맛이야!’ 별로 긴장도 되지 않고 에베레스트의 정취를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세 번째 고소적응을 위한 등반에서 발생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5시에 등반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아이스폴을 향하던 사람들이 내려온다. 캠프1로 가는 길이 무너져 갈 수가 없어 돌아온 것이다.
SPCC 셰르파(각 원정대에서 비용을 받고 셰르파를 고용, 아이스폴 구간의 안전사고 방지를 위해 빙하의 갈라진 틈에 사다리를 놓고 수리함)들이 올라가 사다리를 다시 설치할 때까지는 등반할 수 없었으나 3시간을 기다리다 사다리 설치팀과 함께 등반을 시작했다. 이날 캠프1까지 등반한 팀은 우리밖에 없다.
“그래 정상에 오르려면 이 정도 의지는 있어야지. 길이 무너져도 나아가야지.”
사다리 수리가 생각보다 빨리 끝나 계속 올라갈 수 있었는데 캠프1에 도착할 즈음, 정확히 5시간을 걸은 후에 앞서 가던 유주면 대장이 후퇴를 하잖다. 먼저 올라간 두 후배 종호와 동언(에베레스트 등정자)이가 눈사태 위험이 있어 후퇴를 권했단다. 이제 한 시간만 가면 되는데 ‘Slowly 2Hours’가 아닌 ‘빡센 6시간’을

   
 
다시 올라야 할 생각을 하니 아득해진다.
그래서 대장을 설득해 내가 먼저 오르며 상황을 파악해 보기로 하고 앞서 나갔다. 눈앞에 펼쳐진 청빙(눈이 녹고 얼기를 반복해 바위처럼 단단한 푸른빛 얼음)이 터져 나오는 소리가 들리고 작은 조각들이 떨어져 나를 압도해 버린다. 그러나 200~300m만 지나가면 눈사태, 아니 얼음사태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최대한 빨리 걸으며 위험 구간을 지나쳐 갔다. 그런데 청빙을 옆에서 보니 균열 폭이 너무 컸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으나 냉정을 유지하며 직업정신을 발휘했다.
명색이 건물의 구조를 책임지는 구조기술자인데 이 정도는 정확히 판단을 해야지.
▶붕괴 징후가 있는 청빙의 규모=63빌딩 정도 ▶균열의 위치 및 폭=청빙 상단부에 2~3m 폭의 균열이 수십m 길이로 발생 ▶현재 상태=철거 대상 건물 등급인 E등급 ▶대처 방안=최대한 빠르게 통과하기.
사실 여러 건물의 붕괴 징후를 감지해 왔던 기술자가 아니라 누구라도 위험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다. 붕괴 징후가 여기저기서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난다. 균열이 크게 발생한 곳은 계속 더 커져가고 얼음조각들이 마치 폭탄처럼 계속 터지고 있다. 먼저 오른 후배들의 판단이 옳았다. 옆에서 청빙의 균열을 보고 후퇴할 것을 권고한 것이 정말 훌륭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나까지 올라와 버렸으니 대장과 막내만 올라오면 되는데, 성공적인 등정을 위해서는 빨리 고소적응도 해야 하고 갖고 온 짐도 올려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너무 앞서 나간다.

 # 아찔한 청빙 붕괴, 위기 모면

   
 

나는 막내인 명선이에게 최대한 빨리 위험 구간 지나칠 것을 지시하고 오게 했다. 나는 청빙을 계속 관찰하면서 고도 6천m에서 200~300m를 쉬지 않고 빨리 걷는 것이 쉽지 않다. 명선이가 걸음이 늦어질 때마다 나는 소리를 질러댔다. “빨리와” 그렇게 명선이가 지나오는데도 균열 폭은 커지고 낙빙이 쏟아져 내렸다. 마지막으로 대장인 주면 형만 올라오면 되는 상황. 형은 힘이 들어선지 몇 번인가를 쉬면서 오르는데, “꽝 우르르르르” 갑자기 200m가 넘는 63빌딩보다도 큰 청빙이 굉음을 내며 터지고 주저앉아 집 채 만한 덩어리로 수백m를 흘러내린다.
나는 “형! 빨리와”로 이어지던 외침을 “형, 형 괜찮아?”로 바꿔야 했다. 그리고 몇 분 후 저 멀리서 형의 모습이 보이고 ‘1~2분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는 소리를 자꾸 해댄다. 위험 지역을 간신히 넘어서고 나서 청빙이 무너진 것이다. 형이 무사한 것이 너무 감사했다.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형이 다치기라도 했다면?’ 생각하기도 싫다.
우리만 놀란 것이 아니다. 한참 위 안전한 곳까지 오른 동언이는 위에서 얼음사태를 본 후 나의 외침을 듣고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이 외치는 환청으로 오해했다. 그리고는 자꾸 나에게 원망 아닌 원망을 해댄다. “형 후퇴했어야지요.”

   
 
며칠 전 작은 눈사태를 경험했을 때 ‘그래, 에베레스트에 오면 눈사태도 경험해 봐야지’ 하며 즐거워했던 것이 얼마나 자연을 우습게 여긴 것이었는지를 후회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지금은 눈사태는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날 우리는 캠프1에 오른 유일한 팀이었다. 아니 얼음사태를 경험한 유일한 팀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1㎞에 달하는 눈사태가 발생해 등반자 두 명은 다치고 한 명은 크레버스에 영원히 묻히고 말았다. 지금도 에베레스트는 여러 위험을 안고 있다.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은 그래서 더 많은 이들을 매료시키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위험, 예측할 수는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이 있기에.
우리는 이런 위험을 뚫고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 에베레스트에 우뚝 섰다. <계속>

# 이원록(인천대 산악부 총무, 건축공학과 86학번)대원
▶직업=건축물 구조 설계, 센구조 연구소 소장, 건축구조기술사, 인천대 강사.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2년 동안 원정 준비를 위해 너무 열심히 훈련하다 1년 반 전에 디스크 걸림. 원정을 포기하려 하다가 재활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 회복돼 원정대에 참여.
▶에베레스트 원정 중 포기=45일 동안 4번에 걸쳐 아이스폴 지대를 오르내렸으나 심한 기침으로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해 트레킹팀과 함께 귀국.
▶원정 경험=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6천962m) 정상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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