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높은 곳을 오르기 위한 하산

에베레스트에서는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쉽게 구분된다. 셰르파(고산족)는 3천~4천m에서 살고 있어 산소 소모량이 우리의 60% 정도에 지나지 않아 태생적으로 강해 고산에서 강한 자인 것 같다.

   
 

대원들은 보통 한 달 정도 고소에 적응하는데 이 중에서도 강한 자들이 있으니 40대 중반을 넘어선 주면 형과 광준 형은 체질적으로 고소에 강해 오르는 속도가 빨라 나와 3명의 후배를 힘들게 한다.
사실 고소는 강하고 약한 것이 아니라 고소에 적응돼 있느냐의 문제다. 등반이 본격화되면 체력적으로 강한 자와 약한 자가 구분되나 아무리 강해도 자연 앞에서는 모두가 약한 자다.
정상에 오른 누구나 정상을 잠시 밟고 내려올 뿐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고소에 적응할 수 있는 체질을 갖고 체력적으로 준비가 잘 돼 있어도 날씨가 좋지 않으면 아무도 정상에 설 수 없다.
여섯 명인 우리 원정대는 막내를 제외하고는 모두 7천m 정도를 오른 경험이 있고 체력적으로 잘 준비돼 있어 날씨만 괜찮으면 정상에 오를 것을 확신했다.

에베레스트는 네 번 정도의 고소적응 훈련을 성실히 마쳐야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한두 번 허락한다. 캠프3까지 오르는 네 번째 고소적응 훈련 도중 기침이 심해지고 가슴이 아파온다. 나만 캠프1로 후퇴해 몇 시간을 보내도 기침은 잦아들지 않고 정신이 몽롱해진다. 이 상태로는 긴 밤을 보낼 수가 없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무전으로 상황을 전하고 파워젤 몇 개를 챙겨 오후 5시 30분에 베이스 캠프로 출발한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내려갈 수는 있는지 걱정이다. 하산길은 보통 3시간이 걸리는데 텐트를 나서니 안개가 산을 덮고 있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한 시간 정도를 내려가니 한 팀이 올라온다. 햇빛도 없고 사람도 없어 여유롭게 밤에 오르는 중이며 작년에 왔었는데 실패해서 다시 왔다고 한다.
짧은 대화로 마음의 여유가 생겨 베이스 캠프까지 무사히 가서 누룽지로 늦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밤새도록 기침을 하며 괴롭게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새벽 4시에 따로 일어날 것도 없이 잠자리에서 벗어나 누룽지를 먹고 페리체(4천270m)로 하산한다.

 

   
 
# 선글라스 속에 감춰진 눈물
 
이곳에서는 공기가 희박해 눈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누구나 선글라스를 쓴다. 하산 때 선글라스는 나에게 또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 정상에 설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글썽인다. 색깔이 진한 선글라스가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나의 눈물 어림을 막아준다.
‘참나, 그런데 콧물은 어떻게 하지.’
2년간의 원정 준비, 1년 반 전 훈련 중에 발생한 디스크, 디스크를 이겨 내기 위한 재활훈련, 무박 2일의 산행들, 디스크 재발을 우려한 아내의 원정 반대, 회사에 낸 두 달간의 휴직서 등 원정을 준비하며 생긴 모든 일들이 눈물과 함께 흘러내린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 번의 기회일 뿐, 그 기회가 실패로 연결될지라도 이렇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한 번의 기회를 얻기 위해 선글라스 속의 눈물을 기억하며 푹 쉬자 다짐한다. 고도를 낮춰 기침을 줄이고 정상 공격할 기회를 얻기 위해 하루도 안 돼 2천m가 넘는 하산을 감행한 것이다. 남들은 정상 공격을 위해 캠프3에서 적응훈련을 하는데 나는 하산해 몸을 추스리고 다시 차근차근 오르려 한다.
정상에 설 가능성은 크지 않으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나의 목표는 이제 정상에 서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의 기회를 잡는 것이다.
   
 

2천m의 하산이 나에게 준 뜻밖의 선물은 맑은 정신이다. 5천m 이상의 고도는 나에게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그저 먹고 자고 걷게 만들었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도 생각하지 않고 단지 생존하는 것만을 생각하게 할 뿐이다.
하지만 2천m를 하산하고 나서 나는 다시 생각하는 자가 됐다. 나는 처음 히말라야를 봤던 것처럼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시 눈떴다. 나는 굳은 의지로 정상에 오르려 하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강한 정신을 다시 소유하게 됐다.

맑은 정신을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 나는 펜을 들어본다. 피켈을 들어야 할 손에 펜을 들어 육체적으로는 약하나 정신적으로는 강한 자가 됐다. 혹시 펜을 든 힘으로 다시 피켈을 들고 정상에 설 수 있도록 나아갈지 누가 알 수 있을까. 맑은 정신의 힘이 나를 정상으로 이끌 수 있을지 나의 몸이 나의 정신만큼 강력해 지기를 바란다.

 

   
 

# 개인을 넘어 팀을 위해
 
나는 페리체에서 이틀을 쉬고 베이스 캠프로 돌아갔으나 같은 증세가 다시 나타나 결국 하산했다. 나의 하산 경험은 모두 헛된 것이 되는 듯했으나 같은 증세가 나타난 주면 형과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캠프3에 오르지 못한 종호를 강하게 설득하게 만들었다.
두 명을 데리고 페리체에 함께 내려가 4일 이상을 쉬게 했는데 건강을 회복한 두 명은 다시 올라가 주면 형은 대장으로 책임을 다해 원정대를 성공으로 이끌었고, 종호는 정상에 섰다.

‘정상에 서기 위해 나는 산을 내려왔다. 그러나 실패했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아쉬울 뿐이다.’
‘나는 정상에 설 수 없었지만, 나의 원정은 성공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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