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식 객원논설위원/시인·인천문협 회장

 어제오늘에 처음 있는 일이 아니지만 어느 교수 말대로 ‘참담한 코미디’가 또 연출됐다. 한 외국 텔레비전 앵커가 우리 국회의 미디어법 개정 과정을 소개하며 단상으로 몸을 던지는 의원의 모습을 ‘만화’ 같다며 웃었다는 보도를 보면, 우리 국회가 국제적으로 참 참담한 코미디를 연출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언급하지 않아도 코미디의 내용은 이번 편과 마찬가지로 ’한편에서 법안 통과를 위해 본회의장을 사전에 점거한 뒤 자기들 각본대로 통과 절차를 밟고, 다른 한편에서는 쇠사슬로 문을 잠그거나 부수거나, 그러다가 상대를 향해 고함을 지르고, 윽박지르고, 밀치고, 당기고, 단상을 향해 몸을 날리고…’하는 것이다.

그때그때 강도(强度)는 약간씩 다르지만, 이런 종류의 코미디는 아마 한국인이라면 일생동안 수십 번은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교수는 이런 똑같은 내용에 똑같이 반복되는 끊임없는 국회의 활극이 그래서 참담하다고 말했을 것 같은데, 아마 대부분의 국민은 그다지 참담하게 느끼지 않을 것 같다.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까.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은 이제 국회에 대해 희망을 갖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이가 될 터인데, 국가를 구성하는 기본 3권의 하나인 국회에 대해 국민의 감정이 이렇다는 것도 또한 ‘한국 코미디’가 만들어 낸 딱한 산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지경인데도 여야는 입을 열면 늘 ‘국민과 함께, 혹은 국민을 위해서’를 되뇐다. 그 말대로 라면 이번 미디어법 개정의 활극도 역시 국민을 위한 일일 것이다. 그들의 국민은 어디의 누구일까. 국제적으로 웃음거리나 되는 국민들은 과연 여야가 ‘함께하고, 위한다는’ 그 국민일까…. 참으로 복잡한 상념이 꼬리를 문다.
여야, 곧 정당은 정책 대결에 있어서는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첨예하게 대립했다가도 최후의 표결 과정에서는 오직 투표로써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다. 물리적 충돌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정당이 서로 ‘의논하기 위해 모이는’ 의회(議會)의 본모습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 국회는 의회의 본질인 정책대결, 토론, 설복의 요소를 가지지 못한 것이다. 대화와 의논 없이 막바지까지 와서 투표로 밀어붙이거나, 투표를 ‘육신’으로 막는 ‘참담한 코미디’가 우리 의회의 본모습이다.
이것은, 여야는 상호 파트너라는 민주적 사고가 형성돼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은 모조리 갈등의 대상이요, 전혀 상종 못할 적쯤으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사사건건 극한과 극한으로 다를 수 있는 정당들, 철저하리만치 대화와 소통이 부재한 정당들, 단절의 골이 깊을 대로 깊은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들…. 이것이 우리가 국회를 바라보면서 확인하는 우리의 불행이다.
그래서 미디어법 소란이 난 다음 날 보도된 미국 상원의 모습은 차라리 우리를 절망시킨다. 품위 있고 의미 심중한 대화법으로 여야가 소토마요르 대법관 인준 표결 연기를 결정하는 그 세련된 민주주의 모습이란…. 우리는 언제 그런 국회를 가질 수 있을까?
결국 이번 코미디의 후속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미디어법 개정 의사(議事) 절차가 시비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이 또한 기가 막힌 일이다. 국회의 의사 진행 절차에 대해 다른 헌법기관이 적법 여부 판단을 내려 줘야 한다면 이런 국회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법을 만드는 기관이 법을 만드는 과정에 하자가 있었다고 해서 시비가 된다면 애초에 이것은 입법기관이 아니다.  
이제 여는 시급한 ‘국민의 삶을 돌보러’ 국회를 나서고, 야는 이 법의 부당함을 알리고 무효 투쟁을 위해 ‘국민 속으로’ 간다고 한다. 국민도 국회도 참으로 딱하다. 정말 남이 보기에 부끄럽다. 이 한국 코미디는 언제나 끝이 날까. 그런데 한가지, 이번 미디어법 개정의 사나운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공교롭게도 우리 인천 출신 국회부의장이 의사봉을 잡았고, 1주일이 되는 오늘까지 설왕설래 속에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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