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병관 객원논설위원/인하대 의대 의학전문대학원장

 설 연휴에 뮤지컬 공연을 보러 가는 중 휴대전화가 진동한다. “손병관 선생이지요?” 전형적인 억양 때문에 대학시절의 스승님이심을 알아낸다. “네, 교수님 어떻게…” “학장 연임된다는 소식 들었어. 정말 축하하고, 지금 손 선생이 하고 있는 의학교육 개혁은 2년으로는 안 되는데, 정말 잘 됐어.” 2년 전 학장에 보임되고 인사를 드렸을 때 우리나라 의학교육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던 교수님이시다. 교수님은 우리나라 의학교육에 가장 크게 기여하신 분이시다. 정년퇴임 후에도 다른 의과대학에 초빙돼 가셨는데 그 대학 의학교육을 총체적으로 재구상하시며 의학교육에 관한한 세계적으로 가장 앞선 대학을 몸소 방문하시고 그곳의 의학교육 제도를 도입해 우리나라에 적용을 시도하신 분이다. 그날도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시다가 당시에 만드셨던 의학교육과 관련된 자료를 참고하라고 전해 주셨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가르쳐 주신대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로 인사드리고 전화를 끊었는데 교수님께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거대한 파도가 돼 내 마음에 부딪친다.

지난 1월 말 사은회가 있었다. 해마다 사은회에 참석해 달라는 학생들의 요청을 받았지만 왠지 쑥스러워 참석을 못하곤 했다. 스승의 은혜에 감사드린다는 의미의 모임인데 언제나 ‘그만큼 은혜를 끼친 스승이었느냐?’하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 때문이었다. 그러나 학장으로서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참석해야 했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의사국가고시의 결과가 화두였기에 다음과 같이 인사말을 시작했다. “애들 많이 썼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러나 이 즐거운 자리에 국가고시에 실패해 함께 하지 못한 한 명의 학생에게 학장으로서는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의사가 된 여러분은 사회적으로 강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 힘들어하는 사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고 책임을 갖는다는 마음가짐을 지금부터 키워나가시기 바랍니다”라며 동참하지 못한 한 사람에게도 관심을 갖도록 부탁했다. 덧붙여 새로 출발하는 의사들에게 바람직한 의사상을 시골의사로 잘 알려진 박경철 선생의 글 일부, 즉 “훌륭한 의사의 기준은 ‘다른 사람이 살릴 수 없는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의사’다. 물론 거기에다 ‘환자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의사’라는 다소 상투적인 조건이 하나 더 붙어야겠지만 내가 아는 한 영감(박 선생이 수련 받은 병원의 주임교수)은 이 두 가지를 다 갖춘 의사다.”라는 부분을 인용해 이야기했다.
축제 분위기 속에서도 나는 생각에 빠졌었다. 은혜를 끼치는 스승의 상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 글을 시작하며 인용한 교수님을 다시 떠올렸었다. 의과대학 동아리에서 가난한 이들을 찾아 의료봉사를 떠날 때면 아무리 힘든 곳에 갈 때라도 언제나 함께해 주시고 지도해 주셨던 교수님, 졸업을 앞두고 동아리 모임에서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는 제자들에게 “여러분은 아직도 쉽고 편안하게 살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돈을 벌려면 얼마든지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는 여러분의 도움을 기다리는 너무 많은 힘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라며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을 잇지 못하시던 교수님이시었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전공의 시절, 교수님께서 만드시던 작은 의학 잡지에 실을 내용을 번역해 오게 하시고 번역료를 주신 교수님, 어떤 형태의 글을 쓰던 맞춤법 하나하나, 심지어는 표나 그림에 있는 설명문 하나하나까지도 고쳐주시던 선생님, 환자를 진료함에 있어서는 교과서나 다른 책에 쓰여 있는 대로를 우리들에게 몸으로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
이런 교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고는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좋은 스승을 만났음에 감사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제자들에게 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에 대한 답은 “아니다, 못하고 있다.”였다. 그래서 다짐했다. 더 노력하자고. 제자들에게 바라고 있는 그 역할의 모델이 되자고. 그래서 앞으로는 사은회에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하자고. 특별히 이 사회의 작은이들,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더 관심을 갖는 제자들을 만들어 보자고 다짐했다.

작은 것에 관심 갖고, 마음을 쓰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감동시키는가를 나는 또 그 스승님에게 배웠다. 부족한 제자에 대한 스승의 관심, ‘하늘같은 스승의 은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는’ 스승의 은혜 노래 가사를 곰씹으며 스승임의 중요성과 스승으로서 할 일을 다시 생각해 본다. 의학은 생명을 다루는 학문이기에 의학지식의 중요성은 무엇에 앞서 강조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인간적인 측면에서 스승임과 스승됨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 그것은 새 학년도를 맞는 선생으로서 꼭 해야 할 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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